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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게 독일·일본군 첩보 알려 2차대전 명운 바꿔

중앙선데이 2021.04.03 00:21 730호 22면 지면보기

[세계를 흔든 스파이] 소련군 정보요원 리하르트 조르게

소련에서 촬영 한 조르게. [사진=독일 문서보관소]

소련에서 촬영 한 조르게. [사진=독일 문서보관소]

리하르트 조르게는 옛 소련(1922~91년)이 파견한 최고의 스파이로 통한다. 세계 스파이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상하이 파견돼 일본 지식인 포섭
주일 독대사 신임 얻어 비밀 염탐

히틀러의 ‘소련 침공 작전’ 전달
스탈린이 무시해 2000만명 희생

일본군 동남아 침공 정보도 알려
극동군 유럽 전선으로 돌려 방어

조르게는 광산 기사인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러시아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 수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독일인으로서 조르게는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해 세 손가락과 두 다리를 다쳤다.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평생 다리를 절었다. 병원에서 공산주의자의 딸인 간호사가 건넨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진중 문고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제대한 뒤 대학을 다녔으며 19년 함부르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년 소련에 건너가 ‘공산주의자에겐 사상과 이념이 조국이다’는 말을 실천했다. 코민테른의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스파이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29년 소련군 해외정보국(GRU) 요원이 된 뒤 영국을 거쳐 잠시 독일에 돌아가 나치에 입당해 정체를 세탁했고, 신문기자 신분을 얻었다. 30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견돼 일본인 지식인 공산주의자와 동조 인사들을 포섭해 간첩단을 조직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33년엔 일본에 도착해 ‘람사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박사 학위가 있는 그는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독일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전신) 기고자 신분으로 활동했다. 나치로 행세하며 주일 독일대사관의 무관 출신 대사인 오이겐 오트 장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오트의 추천으로 독일 대사관 정보관 자리를 얻어 그를 보좌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일이 전시 외교공관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독일로 보내는 전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본국의 비밀 전문까지 염탐할 수 있었다.
 
1940년 일본에서 활동하는 모습. [사진=독일 문서보관소]

1940년 일본에서 활동하는 모습. [사진=독일 문서보관소]

41년 6월 조르게는 독일 대사관에서 초특급 정보를 입수해 긴급 타전했지만, 최고 지도자의 아집과 오판으로 무시되면서 재앙에 이르는 과정을 목격해야 했다. 조르게는 그해 6월 22일 시작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보를 주일 독일대사관에서 입수해 소련에 전달했다.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정보였다.
 
하지만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정보 이외에도 독일과의 경계 지역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고받았지만 무시했다. 독재·개인숭배·국가폭력·공포정치로 요약되는 스탈린식 전체주의는 국가 이성이나 합리성 대신에 최고 지도자의 개인적 판단을 우선했다. 숙련된 군 장교들은 95만~120만 명이 학살된 37~38년의 스탈린 대숙청 당시 대부분 처형됐다.
 
조르게가 일본에서 발행받은 외국 통신원 증명서. [사진=독일 문서보관소]

조르게가 일본에서 발행받은 외국 통신원 증명서. [사진=독일 문서보관소]

게다가 스탈린은 39년 8월 23일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같은 해 9월 1일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 동조해 분할 점령했다. 결국 스탈린이 아집에 빠져 자신이 믿는 것만 믿고, 오히려 정보를 의심한 게 패착이었다. 그 대가는 소련인 2000만 명의 목숨이었다.
 
조르게는 독·소전 개전 직후 일본 내각에 심어둔 정보원을 통해 특급 정보를 또 입수했다. 독일과 동맹인 일본이 소련 배후를 공격하는 대신 석유·고무 등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이미 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던 일본은 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어 41년 12월 영국령 홍콩, 42년 2월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차례로 침공했다. 정보를 미리 입수해 알린 조르게 덕분에 스탈린은 극동·시베리아에서 25만 병력을 빼내 유럽 전선으로 돌릴 수 있었다. 전쟁·소련·스탈린의 명운을 바꾼 정보였다.
 
왼쪽은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의 조르게 추념물. [사진=러시아 국방부]

왼쪽은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의 조르게 추념물. [사진=러시아 국방부]

조르게는 무전을 추적한 방첩팀에 덜미가 잡혀 41년 10월 18일 체포됐다. 고문 끝에 자백했고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돼 44년 11월 7일 처형됐다. 전시 일본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오트 대사는 체포 소식을 듣고 “일본의 스파이 히스테리”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믿었다. 일본은 소련에 조르게를 자국 요원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소련은 “그런 사람 모른다”고 잡아뗐다. 조르게의 상관이 숙청돼 그랬다는 분석도 있다.
 
2019년 방일한 러시아 세르게이쇼이 구 국방부 장관이 조르게의 묘지에 찾았다. [사진=러시아 국방부]

2019년 방일한 러시아 세르게이쇼이 구 국방부 장관이 조르게의 묘지에 찾았다. [사진=러시아 국방부]

20년 가까이 잊힌 조르게는 61년 일본 메이저 영화사 쇼치쿠(松竹)가 프랑스와 합작해 ‘스파이 조르게-진주만 전야’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보고를 받은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실화가 맞는지부터 묻고는 사실관계 확인을 지시했다. 그 결과 스파이 조르게의 활약상이 드러났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나치 침공 정보를 입수했지만, 스탈린이 묵살했다는 사실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한 흐루쇼프에게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조르게는 64년 소련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추서 받았다. 소련과 동독에 기념물도 세워졌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청소년기인 60년대 후반 조르게의 영웅담을 접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 되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르게와 동거했던 이시이 하나코(石井花子)는 남은 생애 동안 그의 묘소를 찾았다. 사실혼 관계였지만 숨진 뒤 조르게 옆에 묻히고 묘비에 ‘부인’으로 기록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고노에 총리 보좌관 오자키, 조르게와 ‘내통’ 드러나 사형
일본에서 소련군 해외정보기관의 스파이로 암약했던 독일 출신 리하르트 조르게에겐 수많은 자발적 협력자가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문기자 출신의 공산주의자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実·1901~1944)다.  
 
도쿄대 법대 출신인 오자키는 27년 오사카 아사히(朝日)신문의 특파원으로 중국 상하이에 근무할 때 조르게를 만났다. 식민지 관리인 부친을 따라 대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중국어에 능통한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대학원 재학 시절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를 읽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32년 귀국한 오자키는 이듬해 일본에 온 조르게와 재회해 ‘오토’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했다. 34년 도쿄 아사히로옮겼다가 37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1891~1945년, 재임 37년 6월~39년 1월, 40년 7월~41년 10월) 총리의 보좌관이 됐다. 고노에 총리가 유력 인사와 전문가를 모아놓고 정기적으로 열던 조찬 모임에도 참석했다. 정보 수집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전쟁과 외교 정책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다. 조르게로선 총리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셈이 됐다.
 
오자키가 전쟁에 간여한 사례가 중일전쟁(1937~1945) 당시인 39년의 고노에 성명이다. 고노에는 중국에 일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승인하면 일본군을 2년 내 철수시키고 경제를 지원하고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각이 교체되면서 무산됐다. 총리의 브레인이 이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스파이로 암약했으니 정보는 줄줄 샐 수밖에 없었다.
 
조르게 간첩단 사건에서 16명의 일본인이 재판을 받았다. 2명이 도중에 숨졌고 오자키가 사형, 12명이 15년~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현역 중의원 의원인 이누카이 다케루(犬養健·1896~1960)도 체포돼 기소됐지만,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로 풀려났다. 이누카이는 군축을 주도하다 32년 해군 반란으로 살해된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1855~1932) 총리의 아들이다. 도쿄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두 차례 중의원을 지내고 법무대신(1952~1954)을 맡았던 유력 정치인이다. 스파이가 협력자를 통해 정부 최고위층, 정치인과 접촉했다는 점에서 조르게 사건은 보안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은 동서고금을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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