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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유저들 홀리는 심포니 선율, 공연예술 판 커진다

중앙선데이 2021.04.03 00:20

예술과 게임 크로스오버 붐

세종문화회관이 최초로 기획한 게임음악 콘서트 ‘리그 오브 레전드: 디 오케스트라’. KBS 교향악단·위너오페라합창단·서울시청소년국악관현악단 등 총 75명이 무대에 오른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이 최초로 기획한 게임음악 콘서트 ‘리그 오브 레전드: 디 오케스트라’. KBS 교향악단·위너오페라합창단·서울시청소년국악관현악단 등 총 75명이 무대에 오른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지난 1월 출시되자마자 애플 앱스토어에서 매출 1위를 기록한 국내 게임업체 엔픽셀의 MMORPG(다중 접속 역할 수행 게임) ‘그랑사가’의 OST는 64인조 체코 필하모닉이 연주한 교향곡 풍이다. 일본의 국민 게임 ‘파이널판타지 15’ 음악을 작곡한 세계적인 거장 시모무라 요코를 비롯해 유명 엔지니어와 300명이 넘는 사운드 스태프가 참여했다. 가수 태연이 불러 유튜브 뮤직비디오 132만 뷰를 기록한 공식 타이틀곡 ‘운명보다 한걸음 빠르게’ 등 63곡의 다양한 고음질 음악들이 게임의 장대한 세계관을 극대화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게임음악 콘서트 첫 기획
‘리그 오브 레전드…’ 전석 매진
기존과 달리 2030 남성이 80%

뉴욕필·런던심포니 등 협업 활발
원조 일본선 연 150회 공연 인기

 
게임 개발은 이제 프로그래머만의 영역이 아니다. 예술가와 팝아티스트까지 협업하는 총체적 문화 콘텐트이자 장르 간 경계를 허무는 플랫폼이 됐다. 엔픽셀 방종호 사운드 팀장은 “작곡가와 1년 6개월에 걸쳐 협업했고, 태연 또한 전자음 없는 클래식 반주를 소화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섭외했다. 게임에서 음악은 유저들과 소통을 위한 중요한 차별화 포인트로 자리매김하고 있기에 사운드 자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접근했다. 내부 스태프들 역시 여러 음악 장르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이라고 밝혔다.

  
쌍방향 미디어아트 도입, 휴대폰도 허용

 
엔픽셀의 ‘그랑사가’ OST 앨범. [사진 엔픽셀]

엔픽셀의 ‘그랑사가’ OST 앨범. [사진 엔픽셀]

엔픽셀의 ‘그랑사가’ OST 앨범. [사진 엔픽셀]

엔픽셀의 ‘그랑사가’ OST 앨범. [사진 엔픽셀]

공연계에선 게임 OST를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로 들려주는 게임음악 콘서트가 새로운 장르로 떠올랐다. 2017년부터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가 매년 ‘리니지’ ‘메이플스토리’ 등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열어 왔다. 2019년엔 게임음악 플랫폼 플래직이 해외 유명 게임회사 블리자드와 계약을 맺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해 12월에는 공연계가 셧다운된 와중에도 롯데콘서트홀에서 한국게임산업협회의 ‘아이머게이머’ 공연이 온라인 생중계로 열렸을 만큼 인기다.

 
2일과 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 디오케스트라 콘서트’도 전석 매진됐다. 공공 문화예술기관이 최초로 기획한 게임음악 콘서트라 더 눈길을 끈다. 클래식 콘서트처럼 엄숙한 공연은 아니다. 세종문화회관 사상 최초로 공연 중 휴대폰 사용을 허용했다. 관객과 쌍방향 소통하는 인터랙션 미디어아트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지휘자의 움직임이 모션캡처로 스크린에 구현되고, 관객 2000명이 동시에 휴대폰 터치로 미디어아트를 완성하는 몰입형 공연이다. 오정화 공연기획팀장은 “공연예술 시장의 확장성을 도모하는 기획”이라며 “방대한 게임 시장 소비자들을 공연예술 관객으로 흡수하기 위해 게임 유저들이 일단 와서 즐길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인터랙션 형태로 마련했다”고 밝혔다.

 
해외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클래식계가 게임음악을 적극 수용하는 트렌드다. 클래식의 본고장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2003년부터 매년 클래식홀에서 명문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심포닉 게임음악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2006년에는 뉴욕필도 게임음악 콘서트를 했고, 2008년 런던심포니는 엔씨소프트의 ‘아이온’ OST를 녹음했다.  
 
클래식과 게임음악의 콜라보는 일본이 원조다. 1980년대 컴퓨터가 실제 악기에 가까운 사운드를 구현하게 되면서 게임음악 시장이 탄생했다. 때마침 RPG게임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에 문학성 높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탑재되면서 음악도 게임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예술성을 띄게 됐고, 두 게임의 OST가 웬만한 애니메이션 OST 매출을 넘어설 만큼 인기를 끌자 공연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2019년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가 개최한 넥슨의 ‘마비노기’ 콘서트. [사진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2019년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가 개최한 넥슨의 ‘마비노기’ 콘서트. [사진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87년 NHK교향악단의 ‘드래곤퀘스트’ 콘서트 이후 주요 오케스트라들이 인기 게임음악을 아예 자체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시켰고, 게임음악 콘서트가 연간 150회 이상 열릴 정도로 대중화됐다. 특히 ‘파이널판타지’ 콘서트는 몇 년씩 해외 투어를 돌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지난 2월 개최된 도쿄 콘서트는 무관중 온라인 생중계에 관람료 4500엔(약 4만 6000원)을 받기도 했다.

 
게임 콘텐트는 공연계 입장에서도 확실한 티켓파워와 관객 저변확대까지 꾀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다. 기존 클래식 관객이 아닌 게임 유저가 몰리기 때문이다. 세종문화회관 일반 공연 관객의 80% 이상이 2030 여성임에 비해 ‘리그 오브 레전드’ 콘서트 예매자의 80% 이상이 2030 남성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음악만 들어도 게임 대기화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설렘을 느끼는 유저들이 관객인 만큼, 게임 라이브는 그 어떤 공연보다 자기 체험과 밀접해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이다. 3년 연속 게임 콘서트를 열었던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김지혜 공연기획팀장은 “게임 유저와 클래식 관객의 접점이 없다는 점에 착안했다. 오케스트라 입장에서는 벽을 허물어 관객층을 넓힐 수 있고, 게임 제작사도 마케팅과 팬서비스 차원에서 니즈가 맞아떨어졌다. 10년 이상 된 게임들이라 게임에 대한 추억을 가진 40대 남성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넥슨재단, 판소리·연희 등 창작 지원도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게임산업 진흥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게임을 종합예술의 지류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게임과 예술은 부쩍 가까워지는 추세다. 게임 업계도 순수예술계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단순 마케팅을 넘어, 게임의 가치 확산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도 눈에 띈다. 지난 연말 무용가 김설진과 국악인 원일, 연극 연출가 민준호가 협업해 게임 세상을 표현한 뮤직비디오를 내놨는데, 넥슨재단이 예술가를 지원하는 ‘보더리스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창작 지원에 나서는데, 1회 공모전의 중점 지원 분야로 판소리, 연희 등 전통공연예술에 주목했다.

 
넥슨재단 김정욱 이사장은 “넥슨의 게임을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공유해 크로스오버 창작 실험을 독려하려는 목적”이라며 “전통예술은 게임과 가장 거리가 멀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분야지만, 과거와 현재,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가 만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콘텐트가 문화예술 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휘자 진솔 “비좁은 클래식 시장, 게임 통해 확장하고 싶어”
진솔

진솔

국내 첫 ‘리그 오브 레전드’ 콘서트의 지휘자는 진솔(34·사진)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만하임국립음대를 나와 대구MBC교향악단과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오케스트라, 서울학생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하는 정통 클래식 지휘자다. 그런데 2017년 게임음악 전문 플랫폼 플래직을 세우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는 등 국내 게임음악 콘서트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어려서부터 게임 매니어였다는 그는 “비좁은 클래식 시장을 게임산업과 연결을 통해 확장하고 싶다”고 했다.

 
게이머들이 콘서트에서 뭘 기대할까.
“콘서트는 유저들에게 특별한 이벤트다. 아마 옆자리 앉은 사람이 무슨 생각하는지 서로 다 알 거다. 그 순간을 함께 즐기고 싶고, 잠깐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성덕’(성공한 매니어)이 된 느낌일 것이다. 관객의 기대감이 큰 만큼 일반적인 공연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일반 클래식 콘서트와 분위기가 전혀 다르겠다.
“세종문화회관 같은 공연장에 처음 오는 분도 있다. 실제로 어떤 옷을 입고 가야 되냐고 전화하는 사람도 있고, 공연 30분 전에만 오면 되는데 아이돌 콘서트처럼 대여섯 시간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분도 있다. 클래식 입문에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클래식 지휘자가 게임음악 플랫폼을 차린 이유는.
“클래식계에 연주자와 작곡자 수요공급이 맞지 않는 게 안타까워 시장 자체를 조금이라도 확장하고 싶다. 게임업계가 OST를 해외에 나가 녹음하는 게 관행인데, 과거에 국내 오케스트라가 다 거절을 해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해외로 나가게 된 거다. 클래식계의 인식도 변하고 있으니, 그런 수요를 국내로 돌려 음악가들이 협업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다. 게임이든 뮤지컬이든 국악이든 무용이든 다양한 시장이 결합되는 시기인데, 자기 것만 고집하기보다 모여서 고민하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게임음악은 아무래도 단순한 대중음악 계열 아닌가.
“제작사마다 스타일이 다양하다. 인하우스 작곡팀을 두고 스트라빈스키 느낌이 날 정도로 클래시컬한 사운드를 지향하는 게임회사도 있다. 최근 들어 게임음악에 탐구정신이 강한 전문인력들이 많이 투입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예술적으로도 점점 더 발전할 거라 본다.”
 
유주현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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