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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연못 속 고래'를 큰물에서 놀게 하자

중앙일보 2021.04.02 00:30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북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한 국민연금 본사. 전주-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한 국민연금 본사. 전주-프리랜서 장정필

하마터면 국민의 노후자금 850조원을 좌우하는 결정이 졸속으로 이뤄질 뻔했다. 지난달 26일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다. 이 자리에선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비중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주식 투자자들의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당장 결론을 내지 않고 선거 이후로 연기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국민연금 주식투자 확대론 위험
미래 생각하면 주식 매도 불가피
취약한 의사결정 구조도 문제

논란을 키운 것은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솔한 발언이었다. 권 장관은 지난 2월 24일 제2차 기금운용위원회를 마친 뒤 “주가(코스피)가 2000~3000선일 때 리밸런싱(자산비중 조정) 문제를 어떻게 할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검토하고 다음 기금운용위에 보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선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비중을 확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권 장관은 국민연금 기금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의 위원장이다. 막중한 책임을 생각한다면 자칫 증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은 삼가는 게 맞았다.
동학개미를 자처하는 개인 투자자들의 불평에도 국민연금은 올해 들어 석달간 15조원가량 주식을 내다 팔았다. 앞으로도 꾸준히 주식을 팔 공산이 커 보인다. 주식 투자자들에겐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국민연금 입장에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국민연금에는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이 들어 있다. 이 돈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 것이냐를 결정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국민연금 기금의 취약한 의사결정 구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을 굴릴 때는 안정성과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이 매우 중요하다. 이전 정부에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모델을 본떠 기금운용위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 정부에선 이와 관련한 진지한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기금운용위에는 관계 부처 장·차관과 함께 한국노총ㆍ민주노총ㆍ참여연대 등도 들어간다. 한은 금통위와는 전혀 딴판이다.
국내 증시에서 국민연금은 ‘연못 속의 고래’라고 불린다. 너무 큰 덩치(국민연금)가 작은 물(국내 증시)에서 놀고 있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이 가장 최근에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 1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의 총액은 855조원이었다. 이 중 180조원(21%)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이 비율을 올해 말까지 16.8%로 낮추는 게 목표다. 지난해 5월 박능후 복지부 장관(당시)이 주재한 기금운융위에서 결정했다. 국내 주식과 채권을 팔아서 마련한 현금은 해외 주식과 채권을 추가로 사는 데 쓸 계획이다. 연못 속 고래가 큰물(해외 증시)에서 놀겠다는 의미다. 그래야 작은 물도 살고 고래도 산다.
만일 개인 투자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국민연금이 계속 주식을 사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은 주가가 올라 기분 좋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증시의 파국을 자초하는 길이다. 현 제도에선 국민연금 기금이 적자로 돌아서고 얼마 후 완전히 고갈되는 재앙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국민연금 기금이 적자로 전환하는 시점을 2039년으로 예측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8년이다. 어쩌면 더 빨라질 수도 있다. 과거 X세대로 불렸던 1970년대생들이 차례로 65세에 진입해 국민연금을 받아가기 시작하는 시점과 맞물린다. 국민연금이 일단 적자로 돌아선 뒤에는 빠른 속도로 자금이 말라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때쯤 국민연금이 증시에 쏟아낼 수백조 원의 매도 물량을 누가 받아줄 것인가. 외국인? 천만의 말씀이다.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도 재빨리 발을 빼서 다른 나라로 옮겨갈 것이다. 외국인에겐 굳이 한국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투자할 곳이 있다. 국민연금과 외국인이 한꺼번에 주식을 정리하면 국내 증시는 붕괴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 국민연금 투자운용팀장을 지냈던 홍춘욱 박사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국민연금이 주식을 일제히 팔아치운다고 생각하면 누가 주식 투자를 하고 싶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점진적으로 국내 주식의 투자 비중을 줄여나가기로 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다. 앞으로 예상되는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기금운용본부가 긴 안목으로 설정한 투자 방향을 사회적으로 존중해줘야 한다. 특히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일시적인 여론에 휘둘려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국민연금의 신뢰가 흔들리면 국민의 노후는 더욱 불안해진다.
주정완 경제에디터

주정완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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