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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백신공장 인도의 폭탄선언…한국 2분기 접종 부도 위기

중앙일보 2021.04.01 00:02 종합 1면 지면보기
“2009년 ‘신종플루’ 사태 당시를 뛰어넘는 지정학적 (백신 확보)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
 

세계 각국 ‘자국 우선주의’ 본격화
EU·인도 수출제한, 미국 아예 안해

“1150만 목표, 실제 300만 그칠수도
국가 역량 총동원, 계약분 지켜야”

한국, 변이백신 미리 확보 나서야
러시아 백신 등 도입 목소리에
식약처 “공식적으로 검토 안해”
정은경 청장, 오늘 AZ백신 접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망자가 29만 명을 넘어섰던 지난해 5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내놓은 전망이다. 57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종플루보다 코로나19의 파괴력이 더욱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백신 확보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뒤를 이었다. 1년가량 흐른 지금 이 전망은 현실이 됐다. 각국이 백신 확보를 위한 자국 우선 원칙을 노골화하면서 세계 백신 공급망이 위협받고 있다. 가뜩이나 백신 접종 후발국인 한국은 예정된 물량의 확보도 자신할 수 없게 돼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31일 외신 등에 따르면 ‘세계의 백신 공장’으로 불리는 인도는 최근 “국내 수요가 우선”이라며 자국에서 생산되는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수출을 일시적으로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하루 5만 명이 넘는 신규 환자의 속출, 이중 변이 사례 확인 등 자국 내 2차 유행 본격화 분석이 나오면서다. 세계 코로나19 백신 물량의 60%를 생산하는 인도의 ‘폭탄선언’은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3차 유행을 겪는 유럽연합(EU)도 백신 수출 제한 확대 움직임을 보인다. EU는 제약사들이 유럽 내 생산 백신을 역외로 수출할 때 회원국 승인을 받도록 하는 방식으로 기존 구매 합의 때 약속한 물량을 EU 회원국에 먼저 충분히 제공했는지 확인하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가 자국 내 생산 백신의 호주 수출을 제한한 것도 AZ사가 EU 내 계약 물량을 지키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태였다. EU는 수입국의 감염률, 접종률, EU로의 백신 원료 수출 상황까지 확인한 뒤 수출 승인을 내리기로 했다.
 
이런 ‘백신 이기주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미국이 전 세계 백신의 27%를 생산하면서도 수출하지 않는 걸 두고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외교적·전략적 실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반향이 크진 않다.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 헨리 올슨은 “국가 지도자에게 글로벌리즘(세계통합주의)은 자국의 요구가 그들을 짓누를 땐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백신 민족주의는 순진한 세계화에 대한 유용한 교정책이며 ‘아메리카 퍼스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선진국이 세계 백신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만큼 예견된 일”이라며 “자국 내 공장도, 기술도 없는 이스라엘이나 싱가포르가 의료 정보를 제공하면서까지 비싼 값에 백신을 선구매한 이유”라고 말했다.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도 강대국들이 백신 사재기에 나서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남미 국가들은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다수의 사망자가 이들 국가에서 나왔다.
 
신종플루 때도 백신 사재기 … 확보 못한 국가서 사망자 많아 
 
최근 ‘백신 전쟁’ 움직임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최근 ‘백신 전쟁’ 움직임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호주 매체 ‘더 컨버세이션’은 “당시 세계보건기구(WHO)가 대유행 선언을 하기도 전에 미국은 전 세계 생산 예상치의 30~60%에 달하는 6억 도즈(1회 접종분) 이상의 백신을 주문했다”며 “미국은 최악의 상황이 끝난 뒤에야 비축량 일부를 (다른 나라에) 제공했다”고 전했다.
 
‘백신 이기주의’가 거세지면서 백신 접종 후발국인 한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31일 기준 국내 접종률은 1.64%에 불과하다. ‘아워 월드 인 데이터’에 따르면 같은 날 기준 한국의 인구 100명당 백신 접종률은 세계 평균(7.24명)에 크게 못 미치는 1.62명으로, 세계 111위에 해당한다.
 
코로나19 백신 일반인 접종이 시작되는 2분기(4~6월)를 사흘 앞두고 보건당국이 전한 소식은 “당초 들어오려던 백신이 계획보다 뒤로 밀리고 물량도 줄었다”는 내용이었다. 인도의 수출 중단 등으로 인해 백신 공동 구매·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지난 3월까지 받으려던 AZ 백신은 4월 셋째 주에나 들어올 수 있게 됐다. 물량도 40%나 줄었다. 추가로 2분기에 들여올 예정이었던 70만 명분도 적기 도입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 백신 도입 일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코로나19 백신 도입 일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얀센과 노바백스 등 다른 백신들은 3분기나 돼야 본격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2차 접종용으로 쌓아둔 물량을 풀고는 있지만, 마냥 당겨 쓰긴 어렵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이대로라면 4~6월에 200만~300만 명 맞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우려한다. 당초 정부는 2분기에 1150만 명에 대한 접종을 마칠 예정이었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과 명예교수인 박인숙 전 새누리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민간 전문가들이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국내 코로나 사태가 연내에 진정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썼다. 김우주 교수도 “이젠 돈을 싸 짊어지고 가도 백신을 구하기 힘들게 됐다. 변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말했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국가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적어도 계약한 백신만이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질병관리청에만 맡겨놓지 말고 외교부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국정원장, 각국 대사들까지 범부처 차원에서 달려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량 확보를 위해 러시아의 스푸트니크V 백신 등 다양한 백신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스푸트니크V 백신은 러시아가 지난해 3단계 임상 전 1, 2상 결과로만 세계 최초로 승인한 백신이다. 지난달 초 의학 학술지 랜싯에 예방 효과가 91.6%에 달한다는 3상 결과가 실려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실제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지난달 30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이 스푸트니크V 도입을 검토한다는 취지의 게시물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31일 “공식적인 자료 제출 및 검토 진행은 없다”고 밝혔다.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러시아 백신 확보 노력 등이 현실적으로 큰 효과를 볼 것 같지는 않다”며 “정 안 되면 정부가 상황을 솔직히 설명하고 접종 일정을 조금 늦추는 등 최선의 대책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할 것을 대비한 전략을 주문한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변이 바이러스에 대응할 업데이트 백신 등 개량 백신의 확보에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접종 시작 34일 후인 4월 1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보건소에서 AZ 백신을 접종하기로 했다. 최재욱 고려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AZ 백신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한 달이나 지난 뒤가 아니라 ‘왜 안 맞느냐’는 지적이 나오자마자 맞았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황수연·이우림·이에스더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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