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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중고신인 강승민 ‘전투력 중시’ AI시대에 빛났다

중앙일보 2021.03.31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인공지능(AI)이 바둑을 바꾸고 바둑의 판도를 바꾼다. 누군가에겐 행운이고 누군가에겐 불행이 된다. 28일 끝난 2020-2021 KB바둑리그를 보자. 우승팀 셀트리온의 주장 신진서 9단은 별명이 ‘신공지능’으로 붙을 정도이니 AI의 수혜자임이 분명하다. 한국바둑 부동의 1위 신진서는 AI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중국기사들은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이고 한국팬들은 그가 조만간 세계를 휩쓸어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는 정규시즌 12승 2패, 포스트시즌 2승 1패로 팀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한국물가정보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신민준과 두 번 맞붙어 1승 1패를 기록한 것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첫판에선 대마가 죽었고 두 번째 판에서는 기대승률 10% 미만까지 몰리다가 간신히 역전승했으니 말이다.
 

17전 17승 원성진 맹활약과 함께
바둑리그 셀트리온 우승 이끌어

바둑리그에서 17전 17승을 거두며 전승신화를 쓴 원성진 9단의 경우는 어떤가. AI 시대는 나이가 들수록 후퇴하기 마련이라는 고정관념이 ‘36세 원성진’의 놀라운 활약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다면 원성진은 AI와 어떤 관계일까.
 
원성진은 “AI가 만능은 아닐 것이다. 무조건 AI를 따라 하는 것보다 과거의 바둑 이론과 AI 수법의 조화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AI를 무조건 따라 하기보다는 종래의 이론과 결부시키며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그러나 AI 시대에 가장 이득을 보는 기사는 ‘포석이 약했던 기사’라는 데 동의한다. AI 시대에 포석은 거의 정해져 있다. 요즘 초반에 이상감각으로 점수를 까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AI식 포석이 종료되면 대개의 경우 곧장 전투로 돌입한다.
 
원성진은 본래 두터운 바둑을 구사하며 중후반에 힘을 내는 스타일이다. 전투에도 능하다. 원성진이 포석에 약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스타일이 AI 시대에 적합하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포석은 금방 익힐 수 있지만 전투력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성진은 포스트시즌에서 안정기 6단에게 두 판, 허영호 9단에게 한 판을 이겼다. 세 판 모두 한번도 위기에 몰리지 않은 깨끗한 완승이었다. 그는 AI를 연구하며 분명 뭔가 눈을 떴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본인도 모른다.
 
신진서-원성진 외에 셀트리온엔 또 한 명의 기이한 인물이 있다. 강승민 7단이란 중고 신인이다. 그는 올해 27세이고 한국랭킹은 24위다. 24위라면 꽤 상위권인데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기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력을 살펴봐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26일의 1차전 때 끝없는 난전 끝에 허영호 9단을 격파하며 팀 승리를 결정지었다. 팀의 기둥 신진서가 패배해 위태롭다 싶을 때 슬며시 나타나 승리를 지켜냈다. 그리고 28일의 3차전 때는 물가정보의 주장이자 한국 4위 신민준을 꺾어 3대0 승리의 최고 수훈을 세웠다.
 
허영호를 꺾을 때나 신민준을 꺾을 때나 그는 굉장한 전투력과 수읽기 능력을 보여줬다. 이런 기사가 그동안 왜 업적이 없을까. 한국기원 경력란에 본선이나 16강이 고작이란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강승민은 AI 시대에 처음 두각을 나타낸 기사다. AI 시대는 계산보다는 전투가 중요하다. 전투력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AI는 상상할 수 없는 난전을 즐기고 살고 죽는 것조차 개의치 않는다. 사석전법은 AI의 상용수법이다. 강심장으로 진흙탕 난전을 거듭해 본 기사가 AI로부터 얻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프로 11년 차의 중고신인 강승민이 희망적인 이유다.
 
AI는 이제 바둑의 밑바닥을 조용히 흐르며 모든 것에 관여한다. 3일간 챔피언결정전을 지켜보면서 AI의 힘, AI의 영향력을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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