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정지된 생명’…냉장고가 정물화와 비슷한 이유

중앙일보 2021.03.30 10:00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22)

“이것은 냉장고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 시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그림 그리는 게 재미없었고, 소질도 없었으며, 또 과일은 왜 그렇게 자주 그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 누군가 사물의 본질적 구조, 더 나아가 배치와 배열, 구도를 이해한다거나 묘사의 기초적인 작업이 정물화라는 것을 설명해줬다고 한들 어린 내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치 않았으리라. 아마도 난 더 도망쳤을 것이다.
 
17세기 무렵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사실주의적 정물화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진 pixabay]

17세기 무렵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사실주의적 정물화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진 pixabay]

 
만약 미술 선생님이 정물화에 과일을 그리기 시작한 배경에 대해 알려줬다면 어땠을까. 어린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을까.
 
17세기 무렵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사실주의적 정물화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식민지를 찾아 나선 유럽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신흥 세력인 부르주아가 등장했다. 재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그들은 화가에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자신의 생활을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주로 집안의 부엌과 식탁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는데, 튤립과 같은 진귀한 꽃, 레몬과 파인애플과 같은 귀한 과일, 해안 지역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바닷가재와 석화와 같은 해산물, 그리고 그것을 담은 값비싼 식기가 등장하게 된다. 지금에야 그런 하찮은 과일이 무슨 대수냐고 여길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고가에 거래되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튤립은 중앙아시아 텐샨 산맥이 원산지이고, 레몬은 히말라야에서, 파인애플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왔다.
 
정물화의 고전작품으로 평가받는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와 플라스틱 제품 포장에 관한 고민을 정물화에 빗대어 표현한 프로젝트(QUATRE CAPS의 ‘Not Longer Life’). [사진 QUATRE CAPS]

정물화의 고전작품으로 평가받는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와 플라스틱 제품 포장에 관한 고민을 정물화에 빗대어 표현한 프로젝트(QUATRE CAPS의 ‘Not Longer Life’). [사진 QUATRE CAPS]

 
이러한 설명을 듣고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왜 과일이 귀했을까? 열대 지방의 과일은 당시 유럽에서는 먹을 수 없었겠구나! 맞아, 냉장고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큰 배에는 얼음을 가득 실은 창고가 있었을 거야. 틀림없이 거기에 과일을 보관했겠지…’
 
정물화는 ‘정지된 생명’ 또는 ‘죽은 자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과 생명이 없는 자연을 모아놓고 그린 그림을 말한다. 작품을 의뢰한 부르주아는 그림 속에서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부를 과시하길 바랐지만, 작가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그리면서도 인생의 무념무상과 허무,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정물화와 냉장고의 원리는 비슷하다. 냉장고는 식재료를 얼려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그것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한다. [사진 아시아문화원]

정물화와 냉장고의 원리는 비슷하다. 냉장고는 식재료를 얼려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그것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한다. [사진 아시아문화원]

 
부유한 삶을 산다 한들 죽음 앞에서는 모두 부질없는 것 아닌가. 영원한 것은 없다. 죽음은 불가피하다. 진귀한 과일이나 해산물도 모두 상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검소한 삶의 메시지를 전했는지 모른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허망할 수 있다.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결말은 죽음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정물화와 냉장고의 원리는 비슷하다. 냉장고는 식재료를 얼려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그것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한다. 자연의 죽음을 지체시킬 수 있다. 정물화가 당시 부르주아의 욕망을 담았다고 본다면, 냉장고는 현재 우리의 욕망을 가득 담았다.
 
우리는 무엇을 냉장고라 부르는가.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심효윤 심효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필진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 아시아 지역의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그들의 삶과 문화를 관찰한다. 부엌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냉장고 프로젝트>와 전통지식 및 무형문화유산을 기록하는 <위대한 유산 아시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