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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 실권 쥔 룽윈, 장제스 중앙정부와 ‘줄타기 정치’

중앙선데이 2021.03.27 00:21 729호 33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9〉

룽윈은 장제스의 항일을 적극 지지했다. 2000여 개의 사원에 야전병원을 설치했다. [사진 김명호]

룽윈은 장제스의 항일을 적극 지지했다. 2000여 개의 사원에 야전병원을 설치했다. [사진 김명호]

1926년 7월 1일 광저우(廣州), 국·공합작의 옥동자 국민혁명군(북벌군)이 출정 깃발을 올렸다. 온 중국이 국민혁명(중공은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윈난(雲南)의 통치자 탕지야오(唐繼堯·당계요)는 북벌군의 타도 대상인 북양군벌 편에 섰다. 국가주의를 표방하며 반공과 적색분자 토벌을 제창했다. 군 지휘관들의 불만이 비등했다. “불필요한 전쟁에 무력을 남용한다. 14년간 군림하다 보니 사람이 퇴화했다.”
 

룽, 정변 일으켜 탕지야오 타도
동지 후눠위·장루지 세력도 제거
프랑스가 내정 간섭 못하게 경계

국민정부 윈난성 주석에 취임 후
장과 18년간 협력·대립 관계 유지

중공(중국공산당)은 무장병력이 없었다. 북벌군의 선전에 주력하며 뒤로는 지하조직을 구축했다. 귀 얇고 우수하고 감동 잘하는 문인, 학자, 예술가들을 끌어들였다. 북벌 시작 4개월 후 윈난에도 지하조직을 결성했다. 탕지야오 타도가 목표인 “윈난정치투쟁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문화인들이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탕지야오의 퇴진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탕은 불안했다. 근위대를 강화하고 형제와 친척, 몸종이나 다름없는 측근들을 요직에 앉혔다. 하루에도 몇 건씩 꼴불견이 벌어졌다.
  
윈난 군벌 탕지야오 무능·부패  
 
전쟁 초기, 난징에서 열린 작전회의를 마치고 장제스와 환담하는 룽윈(왼쪽). [사진 김명호]

전쟁 초기, 난징에서 열린 작전회의를 마치고 장제스와 환담하는 룽윈(왼쪽). [사진 김명호]

윈난의 실병력을 쥐고 있던 룽윈(龍雲·용운), 후눠위(胡若愚·호약우), 장루지(張汝驥·장여기), 리솬팅(李選廷·이선정) 등 4명의 진수사(鎭守使)가 연합했다. “예전의 탕지야오는 저렇지 않았다. 인재를 발굴해서 적재적소에 임용했다. 지금은 가까운 사람만 기용하고, 형제나 다름없는 우리를 멀리한다. 끌어내리자.” 1927년 2월 6일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탕이 하야를 선언하자 “저희가 잘 모시겠다”며 총재에 추대했다. 탕의 동생과 측근들은 윈난에서 추방했다. 3개월 후, 탕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임종 직전 4명의 진수사가 달려왔다. 탕은 묘한 유언 남기고 눈을 감았다. “내가 죽으면 4명이 1개월씩 돌아가며 윈난을 통치해라.” 쿤밍(昆明)진수사 룽윈에겐 따로 당부했다. “자리를 잘 유지해라.” 나머지 3명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북벌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국민당 중앙위원회는 군의 발호를 우려했다. 개인 독재와 군사 전제(專制) 방지를 위한 “당권강화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전선에 있는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중앙상무위원회 주석과 군사부장직도 박탈했다. 장제스는 당을 뒤집어엎기로 작정했다. 4월 12일, 상하이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공산당원을 닥치는 대로 도살했다. 난징(南京)에 따로 국민정부를 수립하기까지 1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탕지야오 사망 후 윈난은 군정부를 조직하고 정부위원회를 구성했다. 주석 선출은 유보하고 정변의 주역 4명이 1개월씩 윈난을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첫 번째는 쿤밍진수사 룽윈 몫이었다. 룽윈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4·12 정변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 일면부지(一面不知)의 장제스와 연결을 시도했다. 인편에 지지를 표명하는 서신을 보냈다.
 
윈난군은 저격술이 뛰어났다. 전쟁 기간 일본군 1만2000여 명을 사살한 전설적인 저격부대. [사진 김명호]

윈난군은 저격술이 뛰어났다. 전쟁 기간 일본군 1만2000여 명을 사살한 전설적인 저격부대. [사진 김명호]

룽윈 다음은 후눠위 차례였다. 장루지가 룽윈을 부추겼다. “후눠위를 제거하자.” 룽이 거절하자 당황한 장은 후에게 달려갔다. 촉이 남다른 룽은 직계 루한(盧漢·노한)의 병력을 외곽으로 이동시켰다. 6월 24일 후와 장의 부대가 룽윈의 사령부를 공격했다. 사저에 있던 룽윈은 포격으로 눈에 유리가 박힌 채 포로가 됐다. 현명한 부인 리페이롄(李培蓮·이배련)과 장제스가 룽윈의 목숨을 구했다.
 
윈난의 6·24 정변 소식을 접한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이름으로 룽윈을 윈난성 주석에 임명했다. 리페이롄은 루한에게정변 소식 전하며 병력 출동을 종용했다. 루한의 부대는 윈난 최강이었다. 반격을 받은 후눠위와 장루지는 룽윈을 대형 조롱(鳥籠)에 싣고 쿤밍에서 철수했다. 리페이롄은 쿤밍 주재 프랑스 영사를 찾아갔다. “남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달라”며 “살아있다면 조정에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 윈난은 고립된 지역이었다. 프랑스 소유인 쿤밍에서 하노이까지의 철도가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통로였다. 철길을 타고 들어온 서구 물품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발행한 피아스타 은화로 결제할 정도였다. 쿤밍 50리 밖에 야영 중이던 후와 장은 윈난에 미치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영사가 제의한 평화협정 제안을 수락했다.
  
룽 “같은 민족끼리 평화협정은 휴지”
 
쿤밍으로 돌아온 룽윈은 윈난성 주석 취임과 동시에 루한에게 명령했다. “후눠위와 장루지를 섬멸해라.” 평화협정 거론하며 주저하자 호통을 쳤다. “같은 민족끼리의 평화협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휴짓조각 취급해도 된다. 어겼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미련한 짓도 없다. 약속 장소에 안 나온 똑똑한 화류계 여인 흉보는 것과 같다. 우리 내부 문제다. 이번 일로 프랑스가 끼어들 틈을 줬다. 협정을 준수하다 보면 무슨 간섭 하려 들지 모른다.” 겁먹은 후는 외국으로 도망쳤다. 끝까지 저항하던 장은 룽의 특무요원들에게 사살당했다.
 
룽윈은 신해혁명 이후 서남지역을 대표하는 세력가 탕지야오의 우등생이었다. 탕 밑에서 살벌한 군벌정치의 우여곡절을 헤쳐나가는 솜씨를 배웠다. 윈난의 군·정을 장악한 후에도 자기 영역 밖의 일엔 끼어들지 않았다.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조심하고 자제하며 헤쳐나갔다. 가장 두려운 도전자는 장제스의 중앙정부였다. 룽은 중국의 앞날이 중앙정부에 달려있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끝내 시들고 말았지만, 18년간 중앙으로 흡수하려는 장제스의 온갖 술수와 압력에 교묘하게 맞섰다. 때론 협력하고, 때론 저항했다. 룽윈의 재정 지원을 못 받은 윈난의 국민당 지부는 제구실을 못 했다. 장제스의 야심작인 신생활운동도 시작만 요란했지 성과는 없었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국민정부가 쓰촨(四川)성 충칭(重慶)으로 천도하자 닳고 닳은 중산층과 상류계층이 인근 윈난성으로 몰려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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