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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사회] 왜 부자들은 난해한 현대미술을 살까

중앙일보 2021.03.25 00:30 종합 22면 지면보기

아트 컬렉팅의 사회학

2020년 6월 코로나19 와중에 소더비의 실시간 온라인 경매에서 1015억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되어 지난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프랜시스 베이컨(1909~92)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 [사진 소더비]

2020년 6월 코로나19 와중에 소더비의 실시간 온라인 경매에서 1015억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되어 지난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프랜시스 베이컨(1909~92)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 [사진 소더비]

대개 미술 기사에는 댓글이 많이 달리지 않지만 예외도 있다. 상속세를 미술작품으로 낼 수 있게 하는 물납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찬반 논란이나 어떤 그림이 어마어마한 값에 팔렸다는 뉴스처럼 미술과 돈이 얽혀있을 때 말이다. 지난 2019년, 김환기의 추상화 ‘우주’(1971)가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되어 한국미술 신기록을 세웠을 때도 관련 기사들에 모처럼 많은 댓글이 달렸다. 흥미로운 것은 악플도 많다는 것이다. 네이버 뉴스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은 소위 ‘베댓’들을 살펴보자.
 

현대미술 이해는 문화자본을 요구
문화자본, 경제자본으로 전환 가능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기도 하고
작가와 문화를 지원하는 역할도 해

“그들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걸까”(tlwl****), “이런 거 사는 사람들은 돈이 남아돌아서 사겠지?”(yjul****), “막눈에게는 그저 매직아이일 뿐”(olon****), “재테크 수단이겠지 아님 증여나”(akzm****), “미술품=그들만의 비트코인”(stor****)
 
이 댓글들에 담겨 있는 현대미술에 대한 비난은 두 가지다. 첫째,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부자들의 투기나 절세 수단이 되어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준다. 이 두 가지 비난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이론으로 보면 사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다.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미술의 정의처럼 뛰어난 테크닉(術)으로 아름다움(美)을 창출하는 것에서 점차 벗어나서 인문학적·다학제적 별별 실험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김환기 추상화는 전통적인 화폭에 그려져 있기라도 하지만, 이후 동시대미술은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것처럼 비디오·퍼포먼스·텍스트에 이르는 온갖 장르의 ‘분류하기 힘든 혼합’이며 그 혼합으로 어떤 ‘개념’을 창출하는 게 목적이다.
 
방금 이 설명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이해는 지식을, 그것도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공부로 쌓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미술관에서는 “어려워하지 말고 그냥 느끼세요!”라고 외치지만, 뒤샹의 변기 작품 ‘샘’을 보고 뭐라도 느끼려면 사실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 지식을 쌓고 싶어지게 하는 성향이 필요한데, 그 성향은 어릴 때부터 미술작품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오는 것 등의 환경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그러한 지식과 성향이 바로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자본에 속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자본이 경제자본(economic capital)뿐만 아니라 인맥 같은 사회(관계)자본(social capital), 그리고 문화자본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자본에는 미술작품·책 같은 문화 오브제와 석·박사 학위처럼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지식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교양 수준을 드러내는 말투나 예술에 대한 감식안처럼 몸에 자연스럽게 밴 성향과 기량까지 포함되는데, 이것을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다.
 
소장한 미술작품을 팔아 차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은 경제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다. 경제자본 또한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는데 부르디외에 따르면,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과 공이 든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벼락부자가 상류 사회로 진입하려 하지만 그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아비투스와 인맥이 없어서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부르디외는 사회계급 구분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경제자본보다도 가정에서 축적되는 문화자본이 “가장 잘 숨겨져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문화자본을 얻으려면 교육비를 댈 부모의 경제자본과 간접교육이 되는 부모의 문화자본이 중요하며 경제자본보다도 세습의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계급갈등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기생충’(2019)과 ‘하녀’(2010)에서 상류층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현대미술 교육을 받는 장면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문화자본을 축적한 상류층이 현대미술에 대한 차별화된 지식과 취향을 이용해서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이 선택하는 작가들이 유명해지고, 그런 작가들의 작품값이 오르고, 상류층이 되고 싶은 신흥부자들도 따라서 그들의 작품을 사고, 그래서 그 작가들의 작품값은 더욱 오르고, 부자들은 이것을 팔아서 차익을 거둠으로써 더욱 부자가 되고…. 부르디외 식으로 보면 이런 메커니즘이 그려지는데, 현실이 아니라고는 못 하리라.
 
세계적 아트 페어인 아트바젤의 2020년 설문조사를 보자. 고액순자산(high net worth) 컬렉터로 분류되는, 순금융자산 100만 달러 이상을 가진 컬렉터들은 ‘왜 미술작품을 사느냐’는 질문에 대해 (복수 응답 가능)  95%가 ‘미학적인 또는 장식적인 목적으로’, 93%가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85%가 ‘투자 수익을 위해’, 또 85%가 ‘포트폴리오 다양화를 위해’라고 답했다. 저 메커니즘을 뒷받침해주지 않는가.
 
하지만 이게 다일까. 부자나 엘리트 계층은 그저 그들의 높은 문화자본을 뽐내고 그 문화자본을 영리하게 경제자본으로 환산하기 위해 난해한 현대미술을 사는 걸까? 아트바젤 설문조사에서 컬렉터들의 92%는 ‘아티스트와 문화를 지원하고 싶어서’라고 답했고, 86%는 ‘사회적 이유’라고 말했다.
 
실제로 경제자본으로 환산할 가능성이 요원해보이는, 지나치게 전위적인 작품과 새파란 작가들의 작품만 골라서 구입하는 컬렉터들도 있다. 세상에 처음 나올 때 외면받았으나 나중에 영화·팝음악·디자인 같은 대중문화에까지 영감을 주는 현대미술가들이 이런 컬렉터들이 옆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경우가 많다. 또한 쌓이는 적자를 감수하고서도 자신의 컬렉션을 미술관으로 공개해서 대중이 새로운 실험에 눈뜨게 하는 컬렉터들도 적지 않다.
 
너무 순수하게만 봐서도 안 되고 너무 삐딱하게만 봐서도 안 되는게 아트 컬렉팅이며 미술판이라는 동네다.
 
‘이래도 살래?’하는 개념미술, 그러나 더 잘 팔린 현실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1965)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전시된 모습. 문소영 기자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1965)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전시된 모습. 문소영 기자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가면 전설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 작품인 조셉 코수스 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스툴 버전을 볼 수 있다. 진짜 의자, 의자를 찍은 사진, 그리고 의자의 사전적 정의를 설명한 글의 프린트로 구성된 작품이다.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어떤 방식이 더 정확한지를 관람객이 생각해보게 하는 게 작품의 의도다. 여기서 ‘작품’은 저 의자도, 의자 사진도, 저 텍스트도 아니라, 코수스의 의도를 포함한 아이디어 자체다. 이 아이디어는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의자와 의자 사진과 텍스트로 전시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디어가 작품이라면 팔기 힘들지 않을까? 실제로 1960년대 개념미술 운동이 처음 일어났을 때 ‘개념미술의 사도’였던 아트 딜러·큐레이터 세스 시글럽은 그렇게 주장했다. 시글럽은 당시 미술이 투자하기 좋은 물건으로 전락했다고 비난하며 개념미술은 부자의 소유물이 되기보다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런 작품도 팔렸다! 게다가 팔리기만 한 게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60년대 새롭게 떠오른 미국의 신흥 부유층은 경제자본뿐만 아니라 높은 문화자본을 갖추고 있었고, 이 자본을 투자해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더욱 상층으로 올라가 상류계급의 주도권을 쥐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개념미술이 엄청난 투자 잠재력을 지녔음을, 즉, 그들에게 새롭고 지적인 멋진 부유층이라는 이미지(상징자본)와 금전적 수익(경제자본)을 안겨줄 수 있음을 감지하고 투기적으로 작품을 사들였다. 그 결과 개념미술 작품 가격은 폭등했고 투자자들은 원했던 결과를 얻었다.
 
미술사학자 알렉산더 알베로는 시글럽 자신도 결국 개념미술의 상품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개념미술의 컬렉터들은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처럼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인 것일지라도 투자수익을 거두기 위해 ‘진품’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시글럽은 작가의 서명 또는 소유권 증명서를 양도하는 방법을 통해 그 요구를 맞춰주었다.  여러 작가들도 이에 호응했다. 그런데 이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작가도 경제적 수입이 있어야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이렇게 개념미술은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예술이 부자들의 장식품으로 소비되는 것에 반기를 들었지만, 투기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20세기, 나아가 지금의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예술과 돈의 씨름은 계속되고 있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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