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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방심위 공백 데자뷔

중앙일보 2021.03.24 00:36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문화팀 기자로서 요즘 줄어든 일거리가 하나 있다. 매주 서너차례씩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결과를 챙겨봐야 했던 일이 지난 1월 29일 이후 없어졌다. 임기 3년의 4기 방심위가 업무를 마친지 두 달이 다 돼가지만 아직 5기 방심위가 출범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두 달 가까이 방심위 출범도 못해
정연주 위원장 내정설이 파행 촉발
4기 때도 7개월간 심의 업무 마비

방심위는 9명의 위원들이 방송과 통신·광고 등 3개의 소위원회를 구성, 해당 분야 콘텐트의 내용을 심의하고 제재 조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최근 방심위가 한 일들을 돌아보면 ▶특정 술 로고를 반복 노출하고 음주 장면을 청소년 시청 보호 시간대에 재방송한 KBS2 ‘신상출시 편스토랑’ ▶미국 NASA가 직접 개발한 상품인 것처럼 소비자가 오인하도록 자막과 영상을 내보낸 엔진코팅제 광고(쿠키건강TV) ▶사망한 정의기억연대 쉼터 손영미 소장 자택 내부를 열쇠 구멍을 통해 촬영한 YTN·TV조선·MBN 뉴스 등에 대해 법정제재 혹은 행정지도를 의결했다.
 
또 시청자 문자투표 결과를 조작한 엠넷 ‘프로듀스’ 시리즈엔 억대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사적 보복 논란을 일으킨 ‘디지털교도소’ 의 인터넷 사이트 차단도 방심위 통신심의소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음란물·도박 등 불법 사이트를 단속하고 인터넷 방송을 규제하는 것도 방심위 업무다.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법정 제재 건수는 방송사의 재승인 심사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5년간 방송통신 심의의결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최근 5년간 방송통신 심의의결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런 모든 일이 최근 두 달 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그 사이 방송분야 1500여 건,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통신 분야 6만4000여 건의 민원이 심의 대기 안건으로 쌓였다. 방심위 홍보실은 23일 “사무처 직원들이 이를 분류, 심의 요건을 맞추고 법률 검토를 하는 등 서류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들 민원을 소위원회 심의 안건으로 상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권한도 사무처에는 없다. 수만 건의 민원 처리가 기약없이 미뤄졌다. 이 중엔 폭력적·선정적인 장면을 여과없이 내보내 비판을 받고 있는 드라마 ‘펜트하우스2’(SBS) 관련 안건도 500여건이나 있다. 아무런 제재 없이 오는 27일 시즌2를 마치게 된 ‘펜트하우스2’로선 방심위 심의 중단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백신에 낙태된 태아의 폐 조직이 포함됐다’ ‘백신을 맞으면 유전자가 변형된다’ 등 코로나19 관련 가짜뉴스 심의 및 사이트 차단 업무 역시 중단 상태다.
 
방심위의 지각 출범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4기 방심위가 제때 꾸려지지 못해 빚은 업무 공백 기간은 2017년 6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무려 7개월이었다. 그에 따라 2017년의 방심위 심의 건수는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의 언론보도를 보니 “방심위 심의 기능 마비로 안건 상정 대기 중인 민원 ○만건”이라며 “이 중엔 명예훼손, 음란물 차단 등 시급한 안건도 있다”고 했다. 숫자만 바꿔 ‘복붙’해도 될 법한, 어이없는 데자뷔다.
 
방심위 위원 9명은 청와대와 국회 추천 인사들로 구성된다. 청와대와 국회의장, 국회 상임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각각 3명씩 추천한다. 사실상 정부·여당 추천 6명, 야당 추천 3명의 위원들로 구성되는데 4기 때는 야당 몫 3명을 어떻게 나누느냐 에 대한 이견으로 난항을 겪었다.
 
이번엔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방심위원장 내정설이 파행을 촉발했다. 청와대에서 정 전 사장을 추천하기로 했다는 말이 정치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야당에선 “편향적·편파적 인사”라고 발끈했고, 여당은 “(추천 인사에 포함될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공연한 트집”이라고 맞섰다. 여야 모두 4·7 재·보궐 선거가 끝날 때까지 방심위 문제는 덮어두기로 한 모양새다. 여당은 야당을 두고 “선거 기간 가짜뉴스 퍼뜨리는 데 방심위 없으면 편해서 그러는거 아니냐”, 야당은 여당을 향해 “선거 끝난 뒤 ‘정연주 카드’ 밀어붙이려고 한다”며 업무 공백의 책임을 미루고 있다.
 
이렇게 정치권 계산에 따라 방송·통신 콘텐트 심의의 ‘무정부 상태’는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 됐다. 방심위의 민경중 사무총장이 지난달 10일 국회에 “원활한 업무처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위원 추천을 간곡히 요청드린다”는 편지도 보냈지만, 23일까지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황근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방심위가 여야 나눠먹기로 자기 사람 챙겨주는 자리가 돼선 매번 출범 때마다 파행을 피할 수 없다”며 “일반 공모 등을 통해 분야별 전문가들로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근본적인 개선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지영 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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