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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세 철학자 찾아간 윤석열의 첫 질문 "정치해도 될까요"

중앙일보 2021.03.23 05:00 종합 6면 지면보기
3월 4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뉴스1

3월 4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뉴스1

“교수님, 제가 정치를 해도 될까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9일 101세의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물었다. 5일 검찰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2주간 자택에서 칩거를 깨고 첫 나들이 대상이 대한민국의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란 점, 그의 첫 질문이 ‘정치(政治)’란 점에서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김형석 교수가 전한 윤석열과 대화

 
윤 전 총장은 서울대 법대, 대학원을 졸업한 법학도이자 검사 생활을 27년 했다. 그중 대부분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연구관과 특수부 검사였다. 그에게 정치는 너무 무거운 책무이자 두려운 도전일 수 있다.
 
하지만 40년 연상인 노(老) 철학자의 답은 뜻밖에 간명했고 윤 전 총장에게 큰 위안을 줬다.
 
“애국심이 있는 사람, 그릇이 큰 사람, 국민만을 위해 뭔가를 남기겠다는 사람은 누구나 정치를 해도 괜찮아요. 당신은 애국심이 투철하고 헌법에 충실하려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 같아요. 적극적으로 정치하라고 권하지도 않겠지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에요.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김형석 연세대 명예 교수)
 

김형석 교수 “애국심 있고 그릇 크면 하라”

22일 학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은 지난 19일 오후 김 교수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찾아 2시간가량 동안 이 같은 내용의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윤 전 총장의 아버지인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먼저 “아들과 함께 인사를 한 번 가겠다”고 청해 이뤄졌다고 한다. 윤 전 총장은 학창 시절부터 김형석 교수와 고(故) 강원용 목사(2006년 작고·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를 존경해왔고 두 사람의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윤 전 총장은 평소 주변에 “두 분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김 교수와 강 목사 모두 일제 치하 이북 출신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공통점이 있다. 윤 전 총장은 2016년 7월 김 교수가 출간한 『백년을 살아보니』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중앙일보에 “윤 전 총장이 여러 소용돌이에 휩쓸리다 퇴임한 뒤 복잡한 마음을 어디 털어놓을 데가 없나 하던 차에 나를 찾은 것 같다”며 “처음엔 만남을 거절했다가, 나와 윤 전 총장 부친(윤 교수)의 친분도 있고 해서 한 번 사적으로 보게 됐다”고 밝혔다.
 
윤 전 총장은 김 교수를 만나 앞으로 정치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 교수는 “윤 전 총장은 정치에 대해 뭐라고 태도(입장)를 정하도록 끌려 올라와 있는 사람 같았다”며 “고독감이 많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교수의 설명을 토대로 윤 전 총장과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윤 전 총장: 정부의 무리한 검찰 개혁을 보면서 걱정이 많았어요.
김형석 교수 : 저는 정부가 잘못했다고 봐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정권을 위한 개혁이었어요. 그건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에요.
 
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김: 맞아요. 지금 청와대나 여당에서 꺼내는 이야기는 국민 상식과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내 편은 정의고, 네 편은 정의가 아니다. 이런 이분법이 만연해 있죠. 그걸 바로 잡지 않으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어요.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예요. 많은 사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난하지만, 그때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해결할 것이라고 짐작이 됐는데…. 현 정부 들어서는 짐작을 못 하겠어요.
 
김 교수는 이 자리에서 윤 전 총장의 애국심과 큰 그릇을 짚으며 “정치를 해도 잘할 것 같다”는 조언을 했다. 윤 전 총장은 즉답하진 않았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성룡 기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성룡 기자

 

“운동권과 법조인들 국제 감각 너무 부족…키워라”

윤: 그런데 저는 부족한 게 많습니다.
김: 누구나 보완해야 할 점은 있어요. 우리나라 정치는 법조계와 운동권 출신이 이끌고 있는데, 이 부류의 사람들은 국제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
 
윤: 정치 관련 경험이나 지지세력 등도 부족한데….
김: 그건 괜찮아요. 애국심 있고 그릇만 크면 돼요. 그릇이 크다는 건 뭐냐.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윤 전 총장이 유명해지거나 높은 자리에 오를 욕심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보다 안 되겠다, 걱정스럽다, 이런 건 없어요.
 
윤: 야권에 대통령 할 인재가 없다는 말도 나옵니다.
김: 여권엔 인재가 더 없어요. 문재인 대통령 뒤를 따라갈 사람만 보여요. 인재 없는 건 여나 야나 마찬가지라는 말이에요. 인재는 앞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진짜 문제는 인재가 없는 것보다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 한 이야기들은 윤 전 총장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하려는 많은 사람이 모두 염두에 뒀으면 좋겠어요.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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