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로벌 아이]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중앙일보 2021.03.23 00:3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얼마 전 남부 버지니아를 갔을 때다. 한 백인 남성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일행과 뭐라 이야기한 뒤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스크 없이 접근한 것도 반갑지 않았는데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뜸 꺼낸 말이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영어 할 줄 아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왜 아시아인이 여기 있느냐는 식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부적절한 질문”이라고 반박하자, “뭐가 문제냐”며 “네가 프랑스인이어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둘러댔다. “창피한 줄 알라”고 쏘아붙이고 자리를 떴지만, 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기분은 몹시 상했다.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위스콘신 주 의원에 당선된 한인 2세 프란체스카 홍을 인터뷰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트럼프 집권 후 식료품점 등에서 “영어 할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는 것이었다. 홍 씨는 “세금 꼬박꼬박 내며 사업하는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내가 미국인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게 곤혹스럽다”고 했다.
 
글로벌아이 3/23

글로벌아이 3/23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영어 교과서 첫 장에나 나올 기본 문장이지만, 어느 순간 미국 사회에선 미묘한 어감을 담은 복잡한 질문이 돼 버렸다.
 
한국계인 CNN의 아마라 워커 기자 역시 지난해 10월 루이지애나주 허리케인 현장을 취재하러 갔다가 비슷한 봉변을 당했다. 공항에서 한 남성이 알아들을 수 없는 아시아 언어를 흉내 내며 시비를 걸었는데 역시 시작은 “영어 할 줄 아느냐”였다. 몇 차례 차별적인 상황이 더 이어졌고, 워커 기자는 “지금 생각해도 몸이 떨린다”며 소셜미디어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증오 범죄를 보면, 영어 할 줄 아느냐는 질문 정도는 양반이었지 싶다. 아시아계 노인에 대한 ‘묻지 마 폭행’이 잇따르더니 급기야 여성들을 상대로 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존 조는 “수치심은 인종 차별주의자의 몫”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공유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미국 사회에서 이런 수치심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유색 인종 의원들을 두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거나 “백인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계속 봐 왔으니 말이다.
 
정권이 바뀐 지 두 달이 넘었고 백신 덕에 팬데믹도 점점 끝이 다가오지만, 증오범죄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열리고 있는 와중에도 아시아계에 대한 폭행 소식이 들어오고 있다. 빠르게 퍼지는 증오범죄를 막기 위해 지금 미국에는 ‘수치심’이라는 백신 역시 시급한 상황이다.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