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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00구 시신에 '번아웃'…죽음 진실 찾던 법의관들이 떠난다

중앙일보 2021.03.22 05:00
지난 19일 강원도 원주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본원에서 만난 양경무(53) 법의학부장. 그의 사무실에는 ‘Proba Mortem(프로바 모르템). 남겨진 진실 우리가 찾는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프로바 모르템은 죽음을 입증하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김지혜 기자

지난 19일 강원도 원주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본원에서 만난 양경무(53) 법의학부장. 그의 사무실에는 ‘Proba Mortem(프로바 모르템). 남겨진 진실 우리가 찾는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프로바 모르템은 죽음을 입증하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김지혜 기자

‘Proba Mortem(프로바 모르템). 남겨진 진실 우리가 찾는다.’  

지난 19일 강원도 원주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본원에서 만난 양경무(53) 법의학부장의 사무실에는 라틴어로 ‘죽음을 입증하라’는 의미의 문구가 걸려 있었다. 변사자나 피살자의 사체를 부검해 사인을 밝히는 법의관의 일을 이 글귀가 대변했다. 
 
22년 동안 법의학에 몸담은 양 부장 손을 거쳐 간 망자(亡者)는 3000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풀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망자와 남은 가족들의 허망한 마음을 위로하는 역할”이라고도 했다.
 

법의관은 ‘번아웃’  

법의관들이 부검 시 신고 들어가는 장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라 법의관들도 방역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김지혜 기자

법의관들이 부검 시 신고 들어가는 장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라 법의관들도 방역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김지혜 기자

말 없는 이의 억울함, 사건의 진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법의관 초년생 시절 양 부장은 시체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죽음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망자가 무언가를 얘기해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고 했다. 
 
법의관들은 최근엔 육체적인 피로에도 시달린다고 했다. 법의관의 업무는 단순히 시신 해부에 그치지 않는다. 수사기관과 유가족을 통해 정황·자료를 수집하고 부검을 진행한 뒤 1차 소견을 낸다. 정밀검사를 거쳐 종합소견이 나오면 감정서를 적어 수사기관에 넘긴다. 의뢰 건당 보통 1달, 길게는 2~3달이 걸린다. 살인 사건일 땐 법정에서 증언하는 일도 감당해야 한다.
 
양 부장은 “법의관 1명이 하루에 보통 3~4건씩 부검한다.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이거나 시신 부패가 심하면 시간이 더 걸린다”며 “여기에 행정 업무와 연구도 해야 하니 주중·주말할 것 없이 일한다”고 말했다. ‘번아웃(burnout·탈진)’ 될 정도로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선 “수사 진척을 위해 부검 감정서를 기다리는 경찰, 한시라도 빨리 죽음의 원인을 알고 싶은 유족의 고통을 지나칠 수 없다”고 했다.
 

1명당 시신 300구…떠나는 법의관

국과수가 실시한 연도별 부검 건수.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국과수가 실시한 연도별 부검 건수.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국과수가 수사기관으로부터 의뢰받는 부검은 한해에 9000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과수 내 법의관은 현재 30명 안팎이다. 지난해 말 기준 53명의 정원에 못 미친다. 1인당 300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셈이다. 수련을 겸하는 신규 인력, 행정 업무를 맡는 간부급을 빼면 실제 부검을 담당하는 중견 법의관의 업무 강도는 훨씬 세다고 한다. 인력이 모자라 비연고지로 전근을 가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니 7~8년 차 숙련자들이 하나둘 자신의 업(業)을 포기하고 있다고 했다.
 
양 부장은 “1~2년 차 신규 법의관들이 그만둘 땐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중견 법의관들이 퇴사하겠다고 찾아오면 정말 슬프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오죽 힘들면 이런 결정을 했을까’ 싶어서 붙잡을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부검 급증 계기된 2016년 증평 사건  

강원 원주시 국과수 본원 내 시신 보관실. 시신은 검시 전 이곳에 잠시 머무를 뿐 계속 안치하진 않다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시신이 여러 구 보관될 땐 이곳 전체 온도가 냉장고처럼 낮아진다고 한다. 김지혜 기자

강원 원주시 국과수 본원 내 시신 보관실. 시신은 검시 전 이곳에 잠시 머무를 뿐 계속 안치하진 않다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시신이 여러 구 보관될 땐 이곳 전체 온도가 냉장고처럼 낮아진다고 한다. 김지혜 기자

법의관 업무는 2016년 충북 증평 사건 이후 급증했다고 한다. 80대 여성이 50대 이웃 남성에 의해 살해됐지만, 경찰은 허위로 작성된 검안서를 토대로 자연사 처리했다. 이후 살해 장면이 찍힌 CCTV가 유족에 의해 발견되면서 경찰은 부실 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해 경찰의 ‘변사사건 처리지침’이 변경됐고, 2016년 7772건이었던 부검 건수는 이듬해 1만2897건으로 65% 이상 늘었다. 업무는 급증했는데 정원은 오히려 못 채우니 업무 부담이 가중된 것이다.
 

정원 못 채우는 까닭

최근 10년간 국과수 내 법의관 정·현원 통계.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최근 10년간 국과수 내 법의관 정·현원 통계.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행정안전부는 그동안 국과수 정원과 예산을 늘리는 데 힘을 썼다. 법의관 정원은 지난 2015년까지 20명대의 정원이 결원 없이 다 찼다. 그러다 2016년 38명, 2017년 47명, 2018년 54명, 2019년 55명으로 정원이 꾸준히 늘어났고, 지난해 말 기준 정원은 53명이다. 하지만, 실제 일하는 인원은 계속 정원에 못 미치는 30명대 초반에 머무르고 있다. 
 
법의관 정원이 미달하는 이유가 있었다. 국과수 법의관은 의사면허를 소지한 후 2년 이상 관련 분야에서 연구·근무해야 지원할 수 있다. 양 부장은 “국과수 법의관은 대부분 병리과 전문의”라면서 “애초 비인기 분야인데 남들보다 수련은 더 해야 하니 지원자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원도 원주시 국과수 본원 전경. 김지혜 기자

강원도 원주시 국과수 본원 전경. 김지혜 기자

처우 문제도 법의관 정원 미달의 원인 중 하나다. 행안부에 따르면 일반병원 의사의 평균 연봉은 1억6500만원이다. 국과수 법의관은 5년 차 5급 법의관이 약 8000만원을 받는다. 13년 차 4급 법의관은 1억1000만원가량 받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양 부장은 “법의관은 어차피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봉급만 가지고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다만 “인력이 원활히 수급 된다면 업무 강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고 명예, 안정감, 사명감, 보람 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비바람을 뚫는 항해사처럼”

변사체의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마련된 CT. 김지혜 기자

변사체의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마련된 CT. 김지혜 기자

양 부장은 힘이 들 때마다 3년여 전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긴다고 했다. “비바람 파도 속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노련한 항해사’를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은 힘든 여건에서도 지금의 자리를 지켜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 부장은 한국의 부검률을 더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변사 사건 3만5000건 중 약 1만 건에 해당하는 부검을 진행한다”며 “다른 선진국에 비해 부검률이 매우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국에선 ‘유언비어 생산을 방지하기 위해 유명인의 사망은 무조건 부검해야 한다’ 등의 지침을 두고 부검을 적극 권장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수사 시간을 확보하고 숨겨진 타살을 밝혀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부검이 갖는 의미는 크다. 부검 시 경찰로부터 조서를 받고 검사에게는 최종 감정서를 보내면서 의혹을 다시 한번 되짚을 수 있다”고 말했다.
 

“떠난 법의학 인재들 다시 모으길”

실제 부검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만든 교육 공간. 소독을 위해 자외선(파란빛)을 내리쬐는데 불빛이 닿는 부분은 벽면과 바닥 색이 바랠 정도라고 한다. 김지혜 기자

실제 부검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만든 교육 공간. 소독을 위해 자외선(파란빛)을 내리쬐는데 불빛이 닿는 부분은 벽면과 바닥 색이 바랠 정도라고 한다. 김지혜 기자

국내 법의학이 진일보하기 위해선 ▶전문 기관을 통한 인력 양성 ▶부검 전 중독(혈액)과 외상(CT) 판별할 수 있는 첨단 설비 구비 ▶유관기관 간 긴밀한 공조 등 법·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달 초 ‘검시를 위한 법의관 자격 및 직무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하면서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담았다.
 
양 부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도록 정부·당국·학계 등이 관심을 갖고 한목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법의관 자격 요건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등 현실적 유인책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며 “그런 노력과 준비가 K-검시제도로 나아가는 초석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양경무 국과수 법의학부장 사무실 내부. 김지혜 기자

양경무 국과수 법의학부장 사무실 내부. 김지혜 기자

양 부장 사무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전·현 법의학 종사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탈하고 흩어진 법의학 인재들을 다시 모아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곧 오길 소망한다”고 했다. 함께 꿈꿨던 ‘프로바 모르템’을 위해서.
 
김지혜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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