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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끄면 거추장스러워진다? 김종인 역설, 벌써 그런 조짐

중앙일보 2021.03.20 05:00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오종택 기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오종택 기자

 
통계와 과학으로 무장한 현대 야구에서는 포지션이 같아도 역할이 세세하게 나눠져 있다. 특히, 투수의 경우 선발 투수와 마무리 투수는 전혀 다른 보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선발 투수가 긴 이닝을 안정적으로 책임지는 게 중요하다면 마무리 투수는 언제든 긴급한 상황에 투입돼 불을 끄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야구에서 마무리를 ‘소방수’로 부르곤 한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야구로 치면 소방수 같은 사람이다. 정당이 멀쩡하게 잘 굴러갈 때는 그를 찾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선거에 대패하거나 목전에 선거가 임박했는데 전망이 좋지 않을 때 그의 가치는 크게 올라간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이 됐고,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가 됐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결국 대권의 꿈을 이뤘다. 지난해 4·15 총선 직전에 그는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총선 대패 뒤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당을 이끌기 시작했다.
 
국민의힘 비대위가 출범한 지 9개월이 지난 현재 야권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을 뽑는 4·7 재·보궐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야권 단일화 국면에서 ‘김종인 비토론’ 커져

 
흥미로운 건 국민의힘이 승리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설수록 동시에 커지는 목소리가 김종인 위원장에 대한 비토라는 점이다. 김 위원장을 향한 비판의 표면적인 이유는 야권 후보 단일화 지연의 책임론이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단일화는 야권의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단일화에 걸림돌”(김무성·이재오 전 의원)이라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김 위원장은 안 후보에게 구원(舊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단일화 협상과 향후 대선 국면에서 야권 통합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비대위원장을) 그만두는 게 낫다”는 게 이들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당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들이 단순히 단일화 협상 지연만을 이유로 김 위원장을 비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야권이 이기든 지든 4·7 재·보선 이후 펼쳐질 대선 정국에서 야권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는 이가 많다.
 

김무성 “스스로 장애물 제거해준 안철수 보호해야”

 
지난 18일 김무성 전 의원 등 야권의 전·현직 의원 60여명이 참여하는 포럼 ‘더 좋은 세상으로’(마포 포럼) 특강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발언이 나왔다. 보수 진영의 ‘킹메이커(kingmaker)’를 자임하는 김 전 의원은 이 행사에서 “(내년 3·9 대선에서) 당선되지는 못하지만 우리(국민의힘)를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해) 스스로 장애물을 제거해준 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당에서 환영하고, 잠재적 (대선) 후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야권이 분열하지 않고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안철수 후보를 포섭해야 하는데, “김 위원장이 이성을 잃고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어 사람을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김무성(왼쪽) 전 의원과 이재오(오른쪽) 전 의원이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야권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김무성(왼쪽) 전 의원과 이재오(오른쪽) 전 의원이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야권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까지 포함한 범야권과 민주당의 일대일 승부를 통해 정권을 되찾아오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야권 원로들로서는 김종인 위원장의 행보를 “방해”(김무성·이재오 전 의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계속해서 “재·보선이 끝나면 당에서 사라지겠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국민의힘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이 재·보선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지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재·보선에서 승리하게 되면 곧바로 대선 국면으로 접어든다”며 “윤석열 전 총장을 포함한 범야권의 단일 대오를 위해서는 김 위원장이 계속 남아주는 게 당에 좋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을 거둘수록 쓰임이 사라지는 역설”

 
정치권에선 이같은 상황을 ‘김종인의 역설’에 비유하기도 한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19일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야권 진영 전체에서 김종인 위원장의 효과가 분명히 컸다”면서도 “앞으로는 어떨 것이냐. ‘성공의 역설’이라는 게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이 (야권을 정상화시키는) 성공을 거둔다면 거꾸로 쓰임이 없는 것”이라며 “지금도 ‘(서울시장) 후보가 안 보이고 위원장이 많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앞으로는 ‘우리가 후보 중심으로 가야 할 거 아니냐. 고생한 건 인정하는데 이제는 당신이 별 쓰임이 없다’는 식의 흐름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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