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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슬리퍼’는 어떻게 루이뷔통의 브랜드가 됐나

중앙일보 2021.03.19 00:03 경제 5면 지면보기
201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왼쪽)는 이듬해 시상자로 오른 무대에서 노란색 버켄스탁을 신고 등장했다. [사진 핀터레스트]

201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왼쪽)는 이듬해 시상자로 오른 무대에서 노란색 버켄스탁을 신고 등장했다. [사진 핀터레스트]

여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스웨이드 재질의 노란색 버켄스탁을 신고 등장했다. ‘최악의 패션’이라고 혹평을 받을 법한 상황인데, 의외로 비평가는 환호했다. 미국 패션 잡지 보그는 “브루클린 엄마 신발장의 필수품이 할리우드 패션 아이콘으로 격상됐다”고 평가했다.
 

버켄스탁, 지난달 LVMH에 인수돼
구두 수선공 신발서 명품과 협업
‘반(反)패션’ 대명사에서 주류로
코로나로 편안함 부각…최고 실적

동네 마실 샌들, 사무실 슬리퍼쯤으로 여겨지던 버켄스탁이 명품 그룹의 구애를 받는 패션 브랜드로 거듭났다. 버켄스탁은 지난달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계열 사모펀드에 40억 유로(약 5조4000억원)에 인수됐다. 인수전도 치열했다. LVMH는 벨기에 사모펀드 CVC 캐피털 파트너스와 막판까지 각축전을 벌였다.
 
꼴불견 아재 패션에서 명품 협업 브랜드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버켄스탁은 패션과는 거리가 먼 브랜드였다. 특히 양말에 버켄스탁을 신은 모습은 꼴불견으로 지목될 정도였다. 실제로 버켄스탁이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도 ‘목욕탕 슬리퍼’로 쓰이면서부터다. 19세기 독일로 여행 온 유럽인은 구두 수선공 요한 버켄스탁이 개발한 굴곡진 밑창의 슬리퍼를 사우나에서 사용했고, 발이 편한 신발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200여 년간 실용적인 신발로 여겨지던 버켄스탁은 2013년 올리버 라이헤르트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그는 밑창을 코르크 대신 다양한 색상의 고무로 만드는 등 디자인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명품 브랜드와 협업도 추진했다. 발렌티노·릭 오웬스·프로엔자 슐러 등과 콜라보(협업)한 한정판 제품을 내놓았다. 여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신은 버켄스탁도 발렌티노와 협업한 제품이다.
 
프랑스 AFP는 “버켄스탁은 1960년대 히피들이 즐겨 신으며 ‘반(反)패션(anti-fashion)’의 대명사였는데, 이제는 히피와 유명인을 모두 고객으로 두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재택근무로 편안함 부각
 
양말에 버켄스탁을 착용한 모습은 한때 꼴불견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최근 원마일웨어(집 반경 1마일 이내에서 입는 간편한 옷), 애슬레저룩(일상생활과 레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패션) 등 편안함이 부각되면서 버켄스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버켄스탁]

양말에 버켄스탁을 착용한 모습은 한때 꼴불견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최근 원마일웨어(집 반경 1마일 이내에서 입는 간편한 옷), 애슬레저룩(일상생활과 레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패션) 등 편안함이 부각되면서 버켄스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버켄스탁]

최근 원마일웨어(집 반경 1마일 이내에서 입는 간편한 옷), 애슬레저룩(일상생활과 레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버켄스탁의 독보적인 편안함이 새삼 부각된 면도 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글로벌 애슬레저 시장 규모를 2019년 2819억 달러(약 317조원)에서 2020년 3652억 달러(약 411조3300억원)로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버켄스탁은 1960년대부터 밑창 소재로 라텍스와 코르크 혼합물을 사용하고 있다. 오래 신을수록 밑창이 사람 발 모양대로 변해 더 편해진다. 버켄스탁 측은 “웰빙은 언제나 디자인에 앞선다”고 주장했다. 라이헤르트 CEO는 “아무리 디자인이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 몸에 좋다면 신게 되기 마련이다”며 “약이 입에 쓰더라도 먹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버켄스탁은 코로나 재택근무 기간 중 ‘공식 홈 오피스 신발’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직 2020년도 실적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버켄스탁 측은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캐주얼 신발은 구두를 밀어내며 인기를 끌고 있다. 못생긴 신발의 원조인 크록스의 지난 4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6.5% 증가한 4억1150만 달러(약 4615억원)를 기록했다. 분기 기준 최대 매출이다. 순이익(1억8330만 달러)은 같은 기간 9배 넘게 증가했다. 호실적 덕분에 크록스 주가는 지난 1년 동안 10달러에서 81달러로 8배 뛰었다.
 
투박한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영국 닥터마틴은 올 초 런던 증시에서 37억 파운드(약 5조8084억원) 기업공개(IPO)에 성공했다. 아울러, 글로벌 사모펀드 퍼미라는 지난해 이탈리아 명품 스니커즈 골든 구스를 13억 유로(약 1조7476억원)에 인수했다.
 
미국 보그 비즈니스는 “코로나19는 캐주얼하고, 편안함을 강조하는 의류와 신발 소비를 부추겼다”며 “이 때문에 최근 사모펀드의 관심은 캐주얼 신발 제조업체로 쏠리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 생산 고집하는 장인 정신
 
버켄스탁은 MZ세대(밀레니얼 Z세대)에게 진정성 있는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 진출해 매년 2400만 켤레 이상을 팔고 있지만, 생산량 전부를 독일 괼리츠시에서 제작한다. 1켤레를 만드는데 평균 32명의 손을 거친다. 라이헤르트 CEO는 “앞으로도 아시아 등 다른 어떤 곳으로 생산 기지를 절대로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헤리티지(유산)도 LVMH가 눈독을 들인 이유다. 버켄스탁은 247년 동안 한결같은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이번 인수를 마무리 지으며 “버켄스탁은 신발업계에 몇 안 되는 상징적인 브랜드로 오랜 전통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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