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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메릴 스트리프? 나는 단지 한국의 윤여정”

중앙일보 2021.03.17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재미교포 2세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 [연합뉴스]

재미교포 2세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 [연합뉴스]

“제가 지금 나이 74세인데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고, 여러분 응원에 감사를 전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이렇게밖에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합니다. 이 나이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습니다. 노미네이트 됐으니 이제 수상을 응원하시고 바라실 텐데 후보 된 것만으로 상을 탄 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 소감
응원 감사하지만 솔직히 부담
올림픽 선수들의 괴로움 알 듯

교포 2세들 작은 영화 참여해 보람
노미네이트만으로도 상 탔다 생각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이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런 소감을 전했다. 15일(현지시간) 발표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명단에서 재미교포 2세 정이삭(리 아이작 정·43) 감독의 영화 ‘미나리’는 작품상·남우주연상(스티븐 연)·여우조연상(윤여정)·감독상·각본상(이상 정이삭)·음악상(에밀 모세리) 등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애플TV 미국 드라마 ‘파친코’ 촬영차 캐나다를 방문하고 15일 밤 한국에 도착한 윤여정은 코로나19로 인한 2주간의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마리아 바칼로바(‘보랏 속편’), 글렌 클로즈(‘힐빌리의 노래’), 올리비아 콜맨(‘더 파더’), 아만다 사이프리드(‘맹크’) 등 세계적인 배우들과 아카데미 조연상 트로피를 놓고 겨루게 된 데 대해 그는 “그간 응원이 감사하면서도 솔직히 부담스러웠다”면서 “올림픽 선수들의 심적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자신은 경쟁을 싫어한다면서 “사실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고 후보에 오른 다섯 명 모두가 각자의 영화에서 최선을 다했다. 한 작품을 다른 배우들이 연기해서 등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기에 이 노미네이트만으로도 상을 탄 거나 같다”고 거듭 말했다. 윤여정은 “응원해준 이들에게 감사한다”면서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감사하게 되는 것 같다. 여유가 없을 땐 원망을 하게 되는데 제가 많이 여유가 생겼나 보다. 지나온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고 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미나리’의 주역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이삭 감독, 윤여정, 한예리, 스티븐 연, 노엘 케이트 조, 앨런 김. [사진 A24]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미나리’의 주역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이삭 감독, 윤여정, 한예리, 스티븐 연, 노엘 케이트 조, 앨런 김. [사진 A24]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돌아봤다. 그는 “교포 2세들이 만드는 작은 영화에 힘들지만 보람 있게 참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쁜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전해주고 감독을 소개해 주고 책임감으로 오늘까지도 함께해 주는 제 친구 이인아 PD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독일 교포 출신의 영화제작자 이인아 프로듀서는 윤여정에게 ‘미나리’ 시나리오를 건네준 인물. 그의 설명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함께 자가격리 중이고 전날 후보 선정 소식을 같이 들었다고 한다. 윤여정의 이름이 마지막에 호명되자 이 PD가 울더라는 것. 반면 윤여정은 “멍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고 제작사 A24를 통해 외신에 소감을 전했다.
 
윤여정은 AP통신 등에 “한국 여배우가 오스카 후보에 오른다는 건 꿈도 꿔본 적 없고, 그게 나라니 믿을 수 없다”면서 “영광스러워 멍하다. 마치 딴 세계 이야기 같다”라고도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 오고 싶어하겠지만, 여기에 올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한 뒤 “친구인 인아 PD가 술을 전혀 못 하는 게 문제다. 혼자 마셔야겠다. 저는 일흔이 넘어서 집에서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샴페인 한잔으로 혼자 축하주를 했다고 한다.
 
외신에 따르면 윤여정은 그간 미국 평단이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며 쏟아낸 찬사에 대해 “일종의 스트레스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로 불리는 것이 칭찬이라는 것을 알지만,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메릴 스트리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이고, 저는 단지 한국의 윤여정이다. 모든 사람은 다르고,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힘과 에너지가 있다면 일생의 경험이 될 수 있는 오스카 시상식을 위해 LA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미나리’의 수상 여부는 다음 달 25일 시상식에서 가려진다.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정착 분투기를 그린 ‘미나리’에서 그는 딸 모니카(한예리) 가족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온 친정엄마 순자를 연기했다. 포브스지는 “미나리는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며 “한국계 미국인 가족 이야기이지만, 이민자들이 어떻게 미국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외신들은 지난해 ‘기생충’(감독 봉준호)에 이어 한국계 영화 ‘미나리’가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점도 주목했다. LA타임스는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역사적인 승리를 했지만, 오스카는 아시아 사람들과 아시아계 미국인의 재능을 인정하는 데 있어 최악의 기록을 갖고 있다”며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스티븐 연이 오스카 역사를 만들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할리우드 시상식 예측 사이트 골드더비는 윤여정과 스티븐 연의 후보 지명을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역사적인 후보 선정”이라고 평가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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