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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혁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이루어진다

중앙일보 2021.03.15 00:36 종합 26면 지면보기

선도국가의 비결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기술자들이 분투하고 있는 산업의 현장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늘 가슴이 뛴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의의가 크지만,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왠지 치열한 격전장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
 

시행착오 전수 안되는 한국 산업계
도전적 시행착오 자체가 없는데다
단기적인 성과 중심 문화도 원인
경험 사장되지 않게 축적 노력 필요

제법 큰 규모의 엔지니어링 설계 회사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형 플랜트 설계과제를 수주한 기술자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리는 가운데,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하는 한 기술임원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자주 설계업무를 발주해주는 소위 ‘갑’ 회사에서 플랜트 설계 중 특정 핵심설비는 해외기업의 개념설계를 적용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핵심설비에 자꾸 도전해봐야 새로운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역량이 늘 텐데, 발주회사가 시행착오를 두려워한 탓에 기회를 주지 않으니 답답하다’는 게 핵심이었다. 안타까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어 격렬히 공감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만나게 된 바로 그 문제의 ‘갑’측 회사 임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 핵심설비의 설계에 도전할 수 있도록 몇 차례 기회를 주었음에도 계속 같은 종류의 실수를 반복하니 더 이상 기회를 주기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갑 측 회사가 그 원인을 추적해본 결과는 황당했다. 설계회사에서 기술자가 교체되는 와중에 이전의 시행착오와 뒤처리 과정이 후임자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않았고, 결국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확인되었다. 시행착오는 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이 교훈이 되어 조직적으로 축적되지 않는 설계회사에 어떻게 핵심분야까지 맡기겠느냐는 항변인데, 듣고 보니 이전보다 두 배로 공감이 되었다.
 
축적의시간 그래픽 이미지.

축적의시간 그래픽 이미지.

미국 기계엔지니어협회(ASME, The 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에서는 ‘보일러 및 압력용기에 관한 규격(B&PV Code)’을 매년 펴내고 있다. 그 탄생과정을 보면 새로운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창의적 역량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다. 보일러와 압력용기가 산업용으로 확산하기 시작하던 19세기 중반 이후, 기술자들이 자기만의 노하우로 온갖 새로운 보일러를 설계했다. 당연히 각종 사고가 빈발했다. 1895년부터 10년간 미국 내에서 보일러 사고로 무려 7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날 정도였다. 1905년에는 매사추세츠의 한 신발공장에서 보일러가 폭발하면서, 한번에 58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다치는 참사가 났다.
 
보다 못해 기계엔지니어협회가 나섰다.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그간의 시행착오 경험을 하나하나 검증한 다음 매뉴얼로 정리했다. 그렇게 펴낸 1915년도 첫판이 114페이지짜리의 얇은 책 한 권이었다.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생겼다. 그때마다 이론적 분석과 실험을 병행하며 원인과 해법을 찾고, 설계코드로 정리하여 한 항목씩 추가하였는데, 그 결과 지금 28권에 1만6000페이지가 넘는 매뉴얼이 되었다. 이 매뉴얼은 오늘 1만8000달러만 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공유된 설계지침서의 하나일 뿐 실제 설계에서 사용하는 매뉴얼은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다. 설계회사별로 고유한 경험을 노하우로 정리해놓은 비공개 매뉴얼도 따로 있는데, 회사가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한 페이지씩 늘어간다.
 
선진국 설계회사에서는 새로운 개념설계 작업을 수주하면 일단 이런 매뉴얼을 충실히 찾는다. 매뉴얼에 있는 것까지는 검증이 된 것이니 바로 활용하고, 매뉴얼에 없는 새로운 상황을 해결하는데 창의적인 노력을 집중한다. 혁신적 개념설계의 비밀을 ‘99% 매뉴얼에 1%의 창의’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혁신적 기술은 분명 도전적 시행착오의 결과이지만, 그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그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 앞서 안타까운 한탄을 털어놓던 엔지니어링 회사의 사례를 되짚어보면, 그 설계오류들은 가치있는 시행착오가 아니라 시간과 노력의 낭비에 불과했다.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는 우리 산업 현장의 곳곳에 널려있다. 멋진 사옥에 최첨단 사무환경을 갖춘 디자인 회사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유수의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다 갓 영입된 상무급 전문가는 회사 내에 그동안 했던 디자인의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좌절하고 있었다. 어떤 디자인을 어떤 이유로 했었고, 성과가 어떠했는지 기록이 없이는 창의적인 디자인이 불가능한 것이 글로벌 디자인 업계의 상식인데, 자꾸 백지 위에서 혁신적인 뭔가를 그려내라고 하니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가장 창의적 활동이라는 디자인도 알고 보면 지금까지 밟아본 영역을 확인하고 그 밖으로 한 발 떼어놓는 진화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코딩도 첨단 반도체 칩 설계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왜 우리 산업계에는 새로운 시행착오가 쌓이고 전수되지 않을까. 가장 큰 이유는 도전적 시행착오 자체가 없어서다. 도전적 시도를 꾸준히 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차라리 글로벌 선도기업이 오랜 시행착오의 축적 끝에 완성해놓은 모델을 정답 삼아 벤치마킹한 다음 조금 변형하는 추격자 전략이 더 빠르다. 게다가 실패위험도 낮으니 이만큼 효과적인 전략이 없다. 그 결과 축적의 대상인 도전적 시행착오 자체가 많지 않다. 성과 중심의 문화도 한몫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 완성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더 인정받는 조직문화에서는 중간단계의 시행착오를 축적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요령껏 일단 완성된 것처럼 임시변통해놓은 것이라면 그 원리를 알 수 없으니 써둘 수도 없다.
 
시행착오를 기록했다가 개인적으로 책임추궁을 당한 경험도 일조한다. 조직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니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시행착오를 감추고 성공적인 결과물만 내놓는 현명한 처신을 하는 게 상책이다. 시행착오 경험이야말로 자신만이 알아야 할 비밀이자 경쟁우위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유행처럼 거의 모든 기업과 공공조직이 지식관리시스템 구축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지만, 제대로 쓰고 있다는 조직은 찾아보기 어렵고, 인수인계는 여전히 형식적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기업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정책이나 법 제도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분야별로 살아있는 매뉴얼이 드물고, 고유한 시행착오 경험을 갈무리해놓은 책도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책은 매번 새로 만들어지고, 숱한 백서도 홍보성 치적 모음집이 되기에 십상이다.
 
이런저런 원인으로 우리 산업계에는 개개인의 역량이 중심이 된 ‘개체발생’만 있고, 한 사람의 어깨 위에 또 한 사람이 올라서는 조직적 ‘계통발생’은 없다. 글로벌 기업의 5년 차 엔지니어도 100년의 축적된 경험 위에 올라서면 105년 차 고수가 되고, 그 딛고선 거인의 어깨높이에서부터 자신감 있게 독창적 개념설계에 도전한다. 지금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국가적으로 이런 실용주의에 기반을 둔 축적시스템을 일찍 갖춘 덕분에 산업과 기술을 계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추격단계에 있을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다가 선도국가가 되고자 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도전적 시행착오의 경험을 꼼꼼히 축적하고 철저히 활용하는 문화도 그중의 하나다. 기업에서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새로운 시도의 교훈을 꼼꼼히 분석하고, 공유하며, 전수하는 시스템을 철저히 정착시켜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각 분야에서 귀중한 시행착오를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도록 축적하고 전파하는 문화를 체화해야 한다. 국가적으로도 할 일이 적지 않다. 당장 앞으로 몇 년 동안 8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년 산업현장에서 은퇴할 예정인데, 이들의 경험이 사장되지 않고, 산업 곳곳에서 발전적으로 재활용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우선 챙겨야 할 일이다.
 
독창적 개념설계를 한다는 것은 아직 지도가 없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기록이 없으면 후임자는 매번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비록 늦었지만, 선도국가가 되고자 하는 지금부터 더 과감하게 시도하고, 더 집요하게 축적하는 문화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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