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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서 영화 자꾸 찍냐고? 미국 사는 애들 보고 싶어서”

중앙일보 2021.03.15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영화에서 손자 데이빗(앨런 김·왼쪽부터)의 병까지 품어안는 순자(윤여정)는 가족에게 심은 곳의 흙을 정화하는 미나리 같은 존재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에서 손자 데이빗(앨런 김·왼쪽부터)의 병까지 품어안는 순자(윤여정)는 가족에게 심은 곳의 흙을 정화하는 미나리 같은 존재다. [사진 판씨네마]

“제가 미국서 산 경험이 있잖아요. 제가 봤어요. 친구 어머니가 와서 손자한테 밤을…친구 남편이 아일랜드계인데 너무 놀란 거예요. 멀쩡한 애, 이도 다 있는 애를 왜 밤을 깨물어서 스푼에 뱉어서 주냐. 너네 나라는 그래서 간염이 많다….”
 

오스카상 기대 ‘미나리’의 윤여정
영화 속 순자 모델은 증조할머니
물 아끼려 같은 물로 여러 번 씻어
더럽다고 싫어했던 게 마음 아파

영화 ‘미나리’(3일 개봉)에서 한국 할머니 순자를 연기한 윤여정(74)의 말이다. 미국에 이민 간 딸 모니카(한예리)를 찾아간 순자가 어린 손자 데이빗(앨런 김)에게 삶은 밤을 깨물어 주는 장면에는 그의 실제 목격담이 녹아있다.  
 
재미교포 2세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1980년대 미국 아칸소 시골로 이주한 자전적 가족사를 그린 이 영화는 골든글로브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등 미국 안팎에서 90개 영화상 트로피를 받았다. 그중 32개가 윤여정의 여우조연상이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15일 발표될 제93회 아카데미상 후보 선정 가능성도 높게 본다. 후보에 오를 경우 한국 배우 최초, 수상할 경우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아시아계 역대 두 번째다.
 
제이콥(스티븐 연)은 농장을 일구기 위해 가족과 함께 외딴 시골의 바퀴 달린 집으로 이사한다. [사진 판씨네마]

제이콥(스티븐 연)은 농장을 일구기 위해 가족과 함께 외딴 시골의 바퀴 달린 집으로 이사한다. [사진 판씨네마]

한국에선 개봉 열흘여만인 13일까지 약 45만 관객을 모아 극장가에 봄바람을 몰고 왔다. 가족 생각에 뭉클했단 호평과 함께 기대보다 심심하단 반응도 있다. 미국에선 아메리칸 드림을 품은 지극히 미국적인 이민자 이야기이자, 코로나19 시대에 가족애를 되새기게 해준 영화로 더욱 주목받는 분위기다. 특히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어린 손자와 세대·문화차이를 뛰어넘는 할머니 순자의 인기가 높다. “사랑 많고 입이 거친”(LA타임스) “신스틸러”(USA투데이) 순자 역으로 윤여정은 “한국의 메릴 스트립”(굿모닝 아메리카)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순자는 미나리의 분신 같은 캐릭터다. 손자 손을 이끌고 아칸소 숲속 개울가에 한국에서 가져간 미나리씨를 심으며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 미나리는 원더풀(wonderful)” 노래를 부른다.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데이빗에겐 “한국 냄새 나는(smells like Korea)” 할머니다. 한국서 딸이 좋아하는 고춧가루·마른멸치를 바리바리 싸 오지만, 요리를 하진 않는다. 데이빗이 교회에서 사귄 백인 소년에게 훈수까지 두며 ‘이겨 먹는’ 화투도 순자의 특훈이다.
 
헌신적인 엄마 모니카는 한예리가 연기했다. [사진 판씨네마]

헌신적인 엄마 모니카는 한예리가 연기했다. [사진 판씨네마]

땅에 발붙인 생생한 할머니 캐릭터에는 윤여정의 힘도 크다. 정 감독의 할머니를 흉내 내야 할까, 묻자 정 감독은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라” 했단다. LA타임스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순자의 모델로 증조할머니를 들기도 했다. “제가 열 살 때도 살아계셨는데 그때는 그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면서 “증조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어릴 적 나는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전쟁 후 물이 부족해서 물을 아끼려고 몇 번이고 같은 물로 씻는 것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정말 바보 같았고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고 돌이켰다.
 
사실 ‘미나리’가 윤여정 역대 최고 연기는 아닐지 모른다. 1966년 한양대 1학년 때 TBC TV 탤런트 공채로 데뷔한 그는 MBC로 이적해 71년 주연한 드라마 ‘장희빈’에선 장희빈의 표독스러움을 열연해 분노한 시청자들이 포스터 사진을 찢어버릴 정도였단다. 영화 데뷔작은 같은 71년 출연한 김기영 감독의 ‘화녀’.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여성이 식모살이하던 집의 유부남과 외도하게 되며 광기에 휘말리는 연기로 시체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대종상 신인상을 차지했다.
 
1970년대 중반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나며 사실상 은퇴하는 듯했지만 이혼 후 13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최근 LA타임스에 그는 당시를, 쿠키 굽는 법을 배우며 주부이자 어머니가 되는 데 전념했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어린 두 아이를 키우려 생계를 위해 최소 시급 2.75달러 슈퍼마켓 계산원으로 일해야 했던 고난의 시기로 기억했다.
 
절박함 때문일까. 한국에 돌아와선 더욱 왕성하게 작품에 뛰어들었다.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등을 비롯해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 꾸준한 드라마 활동을 펼쳤다. 영화에서는 ‘센 캐릭터’로 새 전기를 열었다. 2003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두고 늦바람 난 노부인을 연기한 데 이어 부잣집 늙은 하녀로 분한 2010년 판 ‘하녀’(감독 임상수), 돈으로 젊은 남자를 탐하는 역할을 맡은 ‘돈의 맛’(감독 임상수) 등으로 연이어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노인 상대 매춘여성을 연기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로는 2016년 캐나다 판타지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간의 공로로 2017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미나리’에 앞서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에서 영어 연기를 선보였던 그의 차기작도 영어 작품이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애플TV 드라마 ‘파칭코’를 촬영 중이다. “제가 왜 자꾸 미국으로 돌아오는지, 왜 해외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는지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LA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운을 뗀 그는 “아마 제 아들들이 재미교포이고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한 번이라도 더 그 애들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정 감독은 ‘미나리’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걸었던 세상 모든 부모를 향한 러브레터”라며 “미나리는 가족 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이 우리 가족과 닮았다”고 했다. 이는 배우 윤여정이 품어온 또 다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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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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