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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시봉 송가인'이 바로 조영남···청바지 문화 광풍이 키워줬다

중앙일보 2021.03.13 00:10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3〉 ‘쎄시봉’의 뉴 스타

1960년대 후반 음악다방 쎄시봉의 공연 장면.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1960년대 후반 음악다방 쎄시봉의 공연 장면.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음악대학 재학 중인 학생이 팝음악 감상실 쎄시봉엘 가다. 오잉! 이건 큰일 날 일이다. 원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쎄시봉은 끄떡없다. 이런 경우 거길 간 음악대학생이 죽일 놈이 된다. 음대생이던 내가 쎄시봉엘 간 게 1966, 1967년 정도니까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작업복에 헝클어진 머리의 ‘무명’
최고 가수 최희준보다 더 좋아해
강문고 다닐 땐 밴드부서 트럼펫

음대생이 ‘대중음악’ 큰일 날 일
이동원과 듀엣곡 부른 박인수 선배
클래식계 맹비난에 모든 직분 내놔

아니! 어떻게 클래식 정통 음악을 공부하던 학생이 ‘딴따라 음악’, 그것도 짧은 미국 대중음악(팝)을 전문적으로 듣는 저질 음악 감상실엘 출입할 수 있냐.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많이 바뀌었다. 요즘 웬만한 대학엔 대중음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실용음악과가 생겨나 거기 선생 자리 하나 따기에도 매우 치열한 경쟁이 붙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우리 때는 달랐다. 나의 음대 3년 선배인 유명한 테너 박인수 형이 나의 가수 동료 이동원과 세계 최고의 서정시인 정지용(세계 최고라는 수식어에 이의 있다고 생각되는 분은 곧장 중앙SUNDAY의 담당 기자께 연락 주시기 바란다. 끝장 토론할 용의가 있다)의 시 ‘향수’에 최진희 ‘사랑의 미로’를 작곡한 김희갑 선배가 곡을 붙인 불멸의 듀엣곡을 1989년에 함께 불러, 단지 대중음악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대중 가수와 함께 불렀다는 이유로 맹비난과 함께 모든 직분을 내려놔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잘 말해준다. 얼마나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사이가 멀었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런 살벌한 판국에 정통 음대생인 내가 쎄시봉엘 들어가 정식 멤버가 된 것이다. 막가파,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냐 판이 된 것이다. 게다가 거기서 노래 한 곡을 땜빵용으로 불러 대환영을 받았으니 이건 놀라 자빠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버스 못 타기도  
 
만원 버스에 승객을 몸으로 밀어 넣는 안내양. 버스 안내양은 1961년 도입됐다가 80년대 사라졌다. [중앙포토]

만원 버스에 승객을 몸으로 밀어 넣는 안내양. 버스 안내양은 1961년 도입됐다가 80년대 사라졌다. [중앙포토]

한 번으로 그쳤으면 말할 필요도 없다. 두 번째도 똑같이 요즘 표현으로 천장을 찢었으니 문제가 심각해진 것 아닌가. 그동안 나는 노래를 주로 두 곳에서 해왔다. 교회와 학교다. 하! 그런데 반응이 달랐다. 교회는 경건한 장소니까 박수를 받아봐야 한계가 있었고, 학교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식 박수 정도면 잘 받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믿어주시라. 쎄시봉에선 크게 달랐다. “와! 이럴 수가 있구나” 싶었을 정도다. 검정 군복 물감 들인 작업복 차림에 코 납작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정체 모를(초반에 나는 나의 서울음대생이라는 실체를 한사코 안 밝혔다. 으스대는 모습으로 보일까 봐 그랬는데 금방 들통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20대 중반인 꺼벙한 나의 노래에 그토록 열렬한 환호를 보내주다니.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살펴보자. 그 당시 나의 꼬락서니를. 요즘 TV에 나오는 안경 쓴 조영남을 상상하시면 안 된다. 당시 내 행색에 관한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
 
당시 나는 후암동 종점 해방촌 큰 누나네 판잣집에 얹혀살았는데, 후암동 출발 동대문, 을지로 6가까지 가는(거기에 서울음대가 있었다. 지금의 국립의료원 뒷편에) 버스로 매일 왔다 갔다 했다. 우리 때는 버스에 딸린 여차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려 했는데 여차장이 유독 나한테 팔을 벌려 타지 말라는 시늉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금방 눈치챘다. 그건 버스 안에 나의 잡상인 동료가 탔다는 의미다. 나는 선선히 물러나곤 했다. 버스 안에는 이미 칫솔이나 신형 빗들을 파는 잡상인이 활약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때 봤던 얘기 하나를 추가하겠다. 하루는 버스 안에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잡상인이 칫솔을 한 움큼 쥐고 “차내에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연필로 말할 것 같으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어쩌고저쩌고 칫솔을 들고 연필을 따발총처럼 소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킥킥 웃자 머쓱해진 상인이 서둘러 버스를 내렸다. 어제까지 연필을 팔다 오늘 칫솔로 품목 바뀐 걸 깜빡했던 거다.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안 쓸 수가 없어서 쓴다.
 
얼마 후에 다시 쓰겠지만 나는 고향도 두 개(황해도와 충청도), 생년월일도 두 개다(44년생과 45년생). 나는 고등학교 이름도 두 개를 가지고 있다. 빌리브 잇 오어 낫!(Believe it or not) 나는 공식적으로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은 지금 안암동 소재 빛나는 용문고등학교다. 벗!(But) 그러나 실제로는 동대문 근처에 있었던 강문고등학교 10회 졸업생이다. 이 학교가 안암동 쪽으로 옮겨가면서 용문으로 바뀐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쓰겠지만 충청도에서 중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사대부속학교에 시험 쳤다. 낙방하고 이어서 대광고등학교에 덤볐다가 또 떨어지고 무시험이었던 강문고등학교에 당당하게 들어갔던 것이다. 당당하게라는 수식어를 쓴 것은 그냥 상투적으로 쓴 게 아니다. 그때는 뭔 궐기대회, 반공대회,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환영대회 같은 것이 줄을 이었다. 강문고교 밴드부였던 나는 국가행사로 동대문운동장(지금은 동대문 외국 여행객들의 최고의 인기를 끄는 백화점 두타 밀리오레 건너편에 있는 둥근 알루미늄 재질의 잡화 건물로 변함)에 매 대회마다 나팔을 들고 참여해야 했다. 의례적인 행사가 끝나기 직전 확성기에선 반드시 이런 멘트가 흘러나온다.
 
“지금부터 중앙청까지 행진하는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나다순으로 강문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이렇게 나간다. 서울고등학교는 저 뒤 꽁무니에 붙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서의 핵심은 우리의 강문고등학교 밴드가 경기고등학교 밴드를 끌고 행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 얘기는 우리 때의 경기고교와 지금의 경기고교의 차이를 이해 못 하면 알 수 없는 얘기다. 나는 지난 5년 재판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 때의 경기와 지금의 경기의 차이를 설명하는 걸 거부하겠다. 왜냐하면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땅투기 의혹만큼이나 민감한 정부 정책적 사안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차이만 얘기하자면 우리의 나팔과 그 학교의 나팔은 광택 면에서 큰 차이가 났다. 우리 나팔은 헝겊에 기름을 발라 몇 시간이나 닦아낸 광택이었고 경기 걔네들 나팔은 닦을 필요도 없는 으리으리 번쩍번쩍한 신형 최고급 나팔이었다. 좌우지간 강문고교 밴드에서 나는 트럼펫을 불며 경기고교 밴드에서 나와 같은 트럼펫을 불었던 정치인 손학규를 끌고 당당히 행진했던 거다. 세월을 다 보낸 요즘도 우리가 만나면 맨손을 맨입술에 갖다 대고 ‘한국의 자랑’ 같은 행진곡을 딴따라 따라 따라 하고 불어댄다.
 
50년 전 나는 ‘쎄시봉의 송가인’
 
2006년 대권주자였던 손학규씨와 대구의 한 요양원에서 목욕봉사를 함께한 조영남씨. 조씨는 강문고 밴드부 시절 경기고 밴드부였던 손씨와 시가 행진을 함께하며 인연을 맺었다. [중앙포토]

2006년 대권주자였던 손학규씨와 대구의 한 요양원에서 목욕봉사를 함께한 조영남씨. 조씨는 강문고 밴드부 시절 경기고 밴드부였던 손씨와 시가 행진을 함께하며 인연을 맺었다. [중앙포토]

맨 앞에서 나팔을 불며 행진할 때는 당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또 어떤 때는 비굴해지는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 어린 중학생이 한손에 껌을 한 움큼 쥐고 “차내에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일찍이 양부모를 여의고” 어쩌고 하다가 구슬픈 노래를 시작한다. “어어머니이 찾아아 사암만리를” 하는데 버스가 덜컹하면 한쪽으로 쏠리면서 노래를 하는 수 없이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하며 안 쏠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노래를 이어간다. 내 칠십 평생에 최고로 웃픈 노래였다. 우습고 슬픈 노래다. 그런데 나한텐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 소년이 쓰고 있는 학생모의 ‘中(중)’이라는 한자가 틀림없는 강문중학이다. 나는 썼던 모자를 슬쩍 벗어 가방 밑으로 내리며 혼자 중얼거린다. “나는 주간이고 쟤는 야간일 거야.” 아! 비굴 비열했던 필자의 어린 시절이여! 너무 늦었지만 그때 그 중딩 고학생에게 신의 축복이 있으라. 쎄시봉 출입 당시의 내 꼬락서니를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다.
 
하여간 남루하고 허술한 나에게 보내는 환호는 남달랐다. 하기야 조금 있다가 나보다 훨씬 남루해 보였던 송창식이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에 대한 환호는 끔찍했다.
 
왜 정식 가수 차중락한테보다 남루한 대학생 조영남에게 더 큰 환호를 보냈을까. 왜 당대 최고의 최희준보다 무명의 신참을 더 좋아했을까. 왜 그랬을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쎄시봉에서 그때 받은 아주 특별한 환호는 다름 아니라 그때 ‘별들의 고향’의 최인호를 필두로 불기 시작한 청년 문화, 청바지 문화의 광풍의 초기 징조였고, 거기에다 조영남으로 촉발된 우리들에 대한 광풍 때문이었다. 비웃어도 할 수 없다. 하하! 내가 바로 쎄시봉의 뉴스타, 송가인의 큰 오빠, 송영남이었던 거다. 이 광풍은 트로트 열풍이 송가인에서 그친 게 아닌 것처럼 67년 가을 내가 직접 끌고 간 윤형주를 비롯, 송창식·이장희로 이어지면서 광풍은 폭풍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자! 내가 지금 헛소리인지 아닌지를 가려줄 서울문리대 출신의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종철이 쓴 『세시봉 이야기』라는 책자의 30쪽에 실린 글이다.
 
“조영남! 조영남! 홍익대 밴드의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서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를 알아본 어떤 젊은이가 그렇게 연호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합세해서 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조영남은 예의 그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무대로 올라갔다. 관중은 ‘Don’t worry about me(내 걱정 말아요)’와 ‘Sea of Heartbreak(상심의 바다)’를 주문했다. 조영남은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두 곡을 이어 불렀다. 쎄시봉 실내가 터져나갈 듯이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울렸다.”
 
이리하여 나는 아! 내가 50년 전 가수가 되기 전 이미 쎄시봉의 송가인이었구나, 자뻑(스스로에게 반해 푹 빠짐)하곤 한다. 가수도 아닌 가수가 되기 전 버스에서 일용품을 파는 잡상인 행색의, 아직은 이름 없는 무명의 가수지망생의 입장으로 당시의 최고가수 최희준을 능가하는 박수를 받았으니 내가 자뻑으로 그때의 송가인이었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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