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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대통령의 LH 엄포가 공허한 까닭

중앙일보 2021.03.12 00:27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를 “사익을 공익과 교묘하게 결부짓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카이사르는 대대장이나 백인 대장들한테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보너스로 준다. 총사령관의 선심에 감격한 병사들이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당연지사. 지휘관들은?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역시 열심히 싸웠다. 요즘 같았으면 영락없는 독직(瀆職) 행위지만, 그때야 그런 기준이 있었겠나. 나름 일석이조 묘수다.
 

정치 무능·위선 속 각자도생 판쳐
공익과 사익 경계는 갈수록 흐릿
오염된 공정 언어가 먹힐 수 있나

2000여 년을 격한 지금 한국 사회는 반대로 공익을 사익으로 연결하는 능력들이 경이롭다. 선거를 앞두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뿌리는 행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선거 중립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가덕도 앞바다에서 “가슴이 뛴다”고 한 것도 그 예가 되리라. 카이사르와 차이는 있다. 공·사익을 연결하는 방향도 반대지만, 솜씨도 한 수 아래다. 너무 속  들여다보이는 짓이어서 ‘교묘하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의혹에 대해 연일 비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용납할 수 없는 비리 행위’ ‘발본색원’ 등 어휘도 강도 높다. 전매 특허 같은 ‘공정’이란 말도 동원했다. 그러나 어딘가 공허하다. 물에 기름 뜨듯 겉도는 느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익과 사익의 경계가 흐릿하다 못해 아예 섞어 버렸던 여당과 측근들의 행태는 한 번도 제대로 짚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손끝의 곪은 종기 하나 짜내지 못하면서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 국책 공기업에 엄포를 놓는 게 국민에게 먹힐까.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문제가 생기면 일단 장관부터 날리고 시작했다. 정치적 쇼맨십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 국민의 분노는 그런 희생 제의라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 LH의 책임자였던 변창흠 국토부 장관에게 “문제를 대단히 감수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국토부가 가덕도 공항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쳐 죄송하다”고 했던 것처럼 “LH에 비리가 있는 것처럼 비쳐 죄송하다”고 넘어가라는 건가. “(스크린도어 사고를 당한) 걔만 신경을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발언의 주인공에게 어떤 감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번 사태를 보며 유독 걸리는 대목이 있다. 익명성에 기댄 일부 LH 직원들의 반응이다. “이게 우리 회사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 복종과 일상에서 악이 평범해지듯, 선민의식과 관행 속에서 윤리 감각이 마비됐다. 고구마 줄기보다 더 얽혀 튀어나오는 투기 의혹이 그 증거다. “여당 정치인들이 우리 쪽에 정보를 요구해 투기한 것도 봤다. 왜 우리만 갖고 X랄하나”는 반응도 있었다. 현 정부 부동산 정책 설계자는 분명 “부동산은 끝났다”고 했는데, 이 무슨 아수라장인가.
 
청계재단, K재단·미르재단. 공익을 빙자한 사익이라고 비난받았던 전임 정부의 유적들이다. 문재인 정권은 이런 유산을 극복하겠다는 호기로 출발했다. 기대가 배신감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온갖 기득권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한 장관 일가, 아들의 군 휴가 특혜 시비에 휘말린 후임 장관,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한 시민운동가, 개발 정보를 이용한 관광지 투자를 문화유산 보호라고 우긴 여당 의원. 대통령이 그런 측근에 대해 ‘마음의 빚’이 있다고 고백한 순간, 공정이란 말은 오염돼 빛을 잃었다.
 
다락처럼 오른 집값, 말라버린 일자리에 질린 사람들은 국가가 내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이미 깨달았다. 정부가 능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 반복되는 헛발질을 보노라니 이젠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절박해진 사람들은 4자 진언(眞言)을 외운다. 각·자·도·생. 이 길에선 공익-사익의 경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커진 정부에서 기회도 커졌다. 기회는 찬스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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