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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왕버들

중앙일보 2021.03.12 00:11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마을 어른들은 한자리에 모여 짚을 꼬았다. 알곡을 털고 남은 볏짚을 꼬아 굵은 동아줄을 만들면 그때부터 잔치가 시작됐다. 떡 찌는 김이 몽글몽글 솟기 시작하면 힘깨나 쓴다는 청년들을 앞세워 마을 사람들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 그렇게 줄다리기를 하고 남은 줄은 마을 나무에 금줄 삼아 칭칭 감아 맸다.
 
겨울나기를 마치고 새순 돋는 봄이 오면 마을 사람들은 또 이 나무 앞에 모여 제를 지냈다.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로 꼽히는 김제 만경 평야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무는 그렇게 마을을 지켰다. 천연기념물 296호, 김제 왕버들이다.
 
김제시 봉남면에 따르면 300년도 더 된 이 왕버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호신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이 왕버들은 높이 16m, 둘레만도 5m를 훌쩍 넘는 거목이다. 밑동 부분만도 6.9m에 달한다. 1년에 두 차례 제사를 지내오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더는 제를 올리지 않게 됐지만, 왕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상당했다. 성덕마을 이장은 “마을 수호신으로 마을을 지켜준다고 생각해 나뭇가지를 꺾거나 하면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한다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셨다”고 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버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 털왕버들(천연기념물 제298호), 경북 청송 파천면 관리 왕버들(제193호) 역시 수백 년간 마을 사람들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종종 등장하는 버드나무는 책을 만드는 종이(柳木紙)가 되어 진상되기도 했다. 남원 광한루의 버들은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의 한 배경으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들불처럼 땅 투기 의혹이 번지고 있다. 능수버들, 떡버들, 키버들, 호랑버들, 수양버들, 갯버들, 들버들, 당버들…. 의혹의 시발점이 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이 오로지 비싼 값에 토지보상을 받으려 심었다는 왕버들 이야기에 찾아본 버드나무 이야기는 이만큼이나 한국인에게 친근한 나무였던가 싶을 정도로 끝이 없다. 돼지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오로지 돼지로 보이고, 부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인다(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더니, 공복(公僕)의 업은 그들에게 고작 투기의 수단이었던 것일까.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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