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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선출된 권력’의 무자비한 입법 농단

중앙일보 2021.03.11 00:36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181: 33: 15
 

입법권을 선거 필승 카드로 이용
권한 위임한 주권자에 대한 모독
위임 권력 회수 위한 국민소환제
깨어있는 시민들이 적극 나서야

지난달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덕신공항특별법 표결 결과다. 여야가 의기투합하면서 181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됐다. (반대 33, 기권 15)  두고두고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최악의 국책 사업을 법안 발의 92일만에 의결했다. 졸속도 이런 졸속이 없다. 법안을 심의한 의원들은 “동네 하천 공사도 이렇게는 안한다”고 혀를 차면서도 법은 통과시켰다. 입으론 ‘안된다’ 하면서 손으론 찬성 버튼을 눌렀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견원지간이던 여야가 별안간 한마음이 된 건 다음달 있을 보궐선거 승리라는 지상목표 때문이다. 사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제물로 공익을 희생시키기로 공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익을 우선해야 하는 직업윤리를 위배한 것이며, 헌법을 거스른 것이다. 헌법은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하도록’ 규정(46조2항)하고 있다.
 
걸핏하면 “선출된 권력” 운운하는 이들은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와 부조리까지 정당화한다. 하지만 선출된 권력이라도 불가역적 권리를 갖는 건 아니다. 국민이 한시적으로 위임한 권력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권자가 원할 땐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대의민주주의 정신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회는 이런 주권자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있다. 4년에 한번 치러지는 총선 외엔 임기중 잘못을 단죄하고 견제할 수단이 전혀 없다.
 
국회는 같은 선출 권력인 대통령에 대해선 탄핵을 의결할 수 있게 했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회탄핵이 그것이다. 역시 선출 권력인 지방자치권력(단체장·의원)에 대해선 시민들의 결의로 끌어내릴 수 있는 주민소환제가 있다. 하지만 유독 국회의원에 대해선 이런 장치가 없다. 입법권을 독점한 국회의원들의 무자비한 횡포다. 우리 정치가 낯뜨거운 막장 수준의 3류, 4류를 면치 못하는 것도 일단 배지를 달고 나면 더는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런 구조에 원인이 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이다. 특히 최근 한 정파가 거대 의석을 차지하면서부턴 입법권이 자파 세력과 권력자의 이익 도모를 위한 방패막이로 전락해버렸다.
 
공수처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을 보자(2019년 12월 30일 본회의 통과). 21대 총선을 앞두고 변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미끼로 군소 정당을 끌어들여 ‘끼워팔기’한 눈속임으로 시작됐다. 대통령·국회의장·국회의원·대법원장·국무총리등 고위층 비리를 캐는 수사기관이라고 번드르르하게 포장해놓고 정작 기소 대상에선 대통령과 친인척, 국회의원을 쏙 빼버렸다. 기소할 수 없는 사건을 누가 수사하겠는가. 그러니 자신들과 권력자로 향하는 칼날을 무디게 하는 방패였음이 명백해졌다. 이러고도 마음이 안놓였던지 민주당은 법을 또 바꿔 공수처의 독립성과 중립성 보장의 핵심이라고 선전했던 야당의 비토권마저 빼앗아버렸다(2020년 12월10일).
 
경찰의 권한을 높여주고 검찰의 힘을 빼는 검·경 수사권 조정(2020년 1월13일)에 이은 검찰의 기소·수사권 분리, 중수청법(중대범죄수사청)도 착착 진행중이다. 물빠진 갯벌처럼, 쾌속 질주해온 입법 독주가 무엇을 노린 것인지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입법권을 자파 세력의 보신, 정적 죽이기, 선거 승리를 위한 필승 카드로 쓰면서도 죄의식이 없다. 주권자 모독이다. 공직자의 선거 출마 규정(90일전)을 무시하고 판·검사는 선거 1년 전에 그만두지 않으면 출마할 수 없게 한 속칭 ‘윤석열 출마 제한법’ 발의, 5·18을 왜곡 날조할 경우 징역에 처하는 5·18 역사왜곡처벌법과 대북전단살포 금지법 가결, 사상 초유의 판사 탄핵…. 하나같이 집권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주파수를 맞춘 법안이다. 공익의 훼손과 위헌 여부를 따지고 드는 정상적인 국회였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 마구잡이로 헝클어놓은 입법 횡포의 폐해는 당장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LH(한국토지주택공사)사건 수사의 난맥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검찰을 배제하고 수사하려다보니 ‘입구’에서부터 우왕좌왕, 미로찾기 게임을 방불케하고 있다. 입법 권력이 뒤흔들어놓은 난맥상과 권한 남용의 죄과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법 농단과 비교해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입법권 남용의 피해는 훨씬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국민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 이를 입법 농단(壟斷)이라 하지 않으면 뭣이라 부르겠는가.
 
국정농단·사법농단 사건은 혹독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소명의식과 자정 기능을 상실한, 선출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입법 농단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은 채.
 
어물전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탐욕스런 고양이를 더이상 방치할 순 없다. 국회의원이란 업(業)을 생존 수단으로 삼으며 금배지의 특권 뒤에 숨어 추악한 뒷거래를 일삼는 이들을 가려내 경기장에서 내려오도록 휘슬을 불어야 한다. 그게 국민소환제다. 국민소환제의 관철을 위한 운동에 깨어있는 시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이정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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