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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노예의 정치학

중앙일보 2021.03.09 00:30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1980년 광주를 거치며 군사독재의 폭력이 최고조에 달하자,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낙심이 짙게 드리웠다. 저 강력한 군대와 폭력 기구들을 도무지 이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제 민주화는 영 불가능한 일인 듯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민주화는 거짓말처럼, ‘총 한 방 쏘지 않고’ 이루어진다.
 

언제나 피해자로 묘사되는 민중
불의한 사회는 어떻게 지속하는가
민중은 피해자이자 자해적 가해자
사회변화는 민중의 자기해방 과정

“박정희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은 오늘 진보적인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레토릭 중 하나다. 그런데 그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며 성장한 나는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어른’을 본 기억이 없다. 어른들은 독재나 민주주의 같은 것들보다는 제 식구의 안위에 알뜰하게 집중했다. 그들은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빨갱이라 욕하거나, 기껏해야 ‘북한과 대치 상황에서 철없는 짓’이라며 혀를 찼다.
 
그들이 느리지만 조금씩 달라졌다. 1987년 즈음 그들 중 ‘이건 정말 아니다’ 생각하는 쪽이 다수에 이르자 군사독재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운동권에 참여하여 조직적으로 투쟁한 건 아니다. 전과 달리 ‘이건 정말 아니다’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 순간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 눈에 도무지 이길 방법이 없어 보이던 강력한 군대나 경찰, 감시기구 따위들은 무력하기만 했다.
 
사회에 관한 대부분의 서술에서 민중은 피해자로 묘사된다. 민중은 아무런 특권도 기득권도 없이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갈 뿐인데, 불의한 사회가(나쁜 정치인들이,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이, 권력욕에 물든 법조인들이, 타락한 언론이 등등) 그들을 수탈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서술엔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져 있다. 그런데, 불의한 사회는 어떻게 지속하는가?
 
한국 민주화의 과정은 사회 성원 다수가 반대하는 불의한 사회 같은 건 없음을 보여준다. 불의한 사회는 권력을 가진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가담자 덕에 지속한다. 민중은 불의한 사회의 피해자이자 자해적 가해자다. 이 말은 민중을 폄하하는 걸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민중은 자신을 해방하는 역사의 주인이기도, 노예의 삶으로 밀어 넣는 역사의 주인이기도 하다.
 
2016년 교육부 공무원 나향욱 씨는 기자들과 술자리에서 영화 ‘내부자들’ 대사를 인용해 지껄였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됩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됩니다.” 국가의 주권자를 통제와 사육의 대상으로 취급한 망언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결국 그는 그가 개·돼지라 확신해마지않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해야 했다.
 
그 사건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건 이런 거다. 만일 나 씨가 민중은 개·돼지라 생각하면서도 기자들 앞에서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나 씨가 민중은 개·돼지라 생각하면서도 기자는 물론 사람들 앞에선 언제나 힘주어 ‘민중은 국가의 주인’ ‘공직자는 머슴’이라고 말하고 다녔으면 어땠을까? 진보적인 관료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정치권으로 진출했을지도 모른다. 현 정권과 민주당엔 그런 인물들이 많기도 하다.
 
이따금 불거진 망언에나 발끈하곤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주인이 아니라 피해자의 태도다. 주인에겐 주인으로서 식견과 태도가 있다. 민주화처럼 기존 현실을 빠져나오는 경우든, 혁명처럼 전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경우든 다르지 않다. 러시아혁명이 결국 소련 패망으로 실패한 원인은 스탈린이라는 인물로 집중되곤 한다. 레닌까지는 괜찮았는데 스탈린이라는 광포한 인물이 모두 망가트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제헌의회를 해체하고 혁명 정신의 구심인 소비에트(인민평의회)가 공산당 독재로 바뀌는 건 레닌 초기 일이다.
 
그렇다면 러시아혁명 실패의 원인은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에 있는가? 답은 질문 속에 들어 있다. ‘지도자가 누구인가’로 결정되는 사회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가 아니다. 혁명은 민중이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엘리트와 관료를 부리고 견제하며, 사회 제도와 관습들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는 ‘자기해방’ 과정이다. 러시아 민중은 엘리트와 관료에 혁명을 의탁하고 심지어 개인숭배까지 치달았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차르제였다.
 
지난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를 ‘(촛불) 혁명’이라 보는 관점을 따른다면, 현재까지 경과는 실패한 혁명의 답습이라 할 만하다. 오늘 ‘적폐청산’ ‘검찰개혁’ 같은 구호를 따르는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적 민주주의’ ‘선진조국건설’ 같은 구호를 따르던 사람들과 같다. 둘은 각각 오늘 독재(자본독재)와 옛 독재(군사독재)를 지탱한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반독재 프레임을 고수하며 30여 년을 ‘비판적 지지’로 일관, 진보정치 궤멸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신(新)수구화를 낳은 사람들보다 못한가는 의문이다.
 
로마인들은 노예를 ‘제 운명을 결정한 권리가 없는 자’라 정의했다. 민주 공화국 시민으로서 우리는 성찰과 긴장을 담아 재정의할 수 있겠다. 노예는 ‘제 운명을 결정한 권리를 포기한 자’이다.
 
김규항 작가·『고래가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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