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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우주의 향기

중앙일보 2021.03.09 00:17 종합 28면 지면보기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우리는 보통 삶의 향기라고 하지 삶의 맛이라고 하지 않는다. 저절로 퍼져나가는 향기의 덕성을 생각해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좋고 선한 것을 보면 향기라 하고, 나쁘고 악한 것을 악취라고 부르며, 전자는 권유하고 후자는 혐오하곤 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서
진리와 사랑의 향기로
사회의 악취 이겨내자

오래전에 한 사람이 있어서 자신 속에 심어진 영성이나 불성(佛性)을 깨닫고 거기에서 오는 진리, 사랑, 선을 이웃에 실천하면서 스스로도 큰 환희를 느꼈다고 해보자. 생전에 그의 깨달음, 진리, 사랑, 선행, 환희는 꽃향기처럼 저절로 퍼져나갔다. 그런 인격의 향기는 사후에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전해졌다. 이는 우주의 향기라 할 만하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맑고 향기로운가? 주위를 살펴보면 향기는커녕 곳곳이 거짓과 독선, 분열과 갈등의 악취로 가득 차 있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우주의 향기까지는 아니어도 진리와 사랑의 덕을 잘 닦아서 스스로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는 길 밖에.
 
법정 스님(1932~2010)은 자연의 빛과 소리 그리고 향기에 유달리 민감했다. 그는 꽃향기와 차향(茶香)을 자주 말했지만, 한밤중 중천에 떠 있는 달님을 보고도 ‘아, 달빛에서도 향기가 나네’라고 하며 찬탄했다.(『오두막편지』) 그는 한 도반(道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의 향기란, 맑고 조촐하게 사는 그 인품에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운이라고 생각된다. 향기 없는 꽃이 아름다운 꽃일 수 없듯이 향기 없는 삶 또한 온전한 삶일 수 없다.”(『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이 구절은 도반이 풍기는 청빈의 향기를 달빛이나 풀향기에 비유하며 쓴 수필에 나온다. 청빈의 향기를 전하는 법정의 명상 에세이도 참 향기롭다.
 
예순이 다 된 마하트마 간디(1869~1948)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전도하여 남을 개종하려고 하는 것은 신이 주신 충동이 아닐까요?”라고. 간디는 장미꽃이 저절로 자신의 향기를 전달해 주듯이, 우리의 영적인 깨달음, 진리, 참기쁨과 선은 스스로 활동하므로 일부러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악은 부정적인 힘이어서 도덕으로 위장해야 전진한다고 했다.(간디 『문명·정치·종교』, 나남) 영성, 진리, 사랑, 선은 저절로 움직이지만, 악은 선한 척해야 전진한다는 것이다.
 
간디에게 향기의 주요 원천은 붓다와 예수, 마호메트와 같은 성자였다. 간디는 붓다에 대해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가식을 버릴 것을, 진리와 사랑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대로 사신 분이라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희가 하는 짓을 모릅니다’라고 하며 기도한 장면은 간디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간디는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 그리고 완전한 언행일치를 성자의 특성으로 보았다.
 
우리는 성자들의 인격에서 피어나는 향기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 장미꽃 향기에 나의 후각이 필요하듯이, 붓다나 예수의 삶이 주는 향기를 받자면 내 속에 있는 영성, 곧 하나님의 씨앗이나 불성이 깨어나야 한다. 깨어남에는 윤리적 행위가 필수여서, 간디는 자신과 아슈람 구성원에게 비폭력, 순결 등의 서약을 요구했다.  
 
간디는 정치인도 사람이니 그에게서 진리와 사랑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장미꽃 향기를 말할 때, 그리고 우리 모두 큰 생명 바닷속의 같은 물방울들이니 서로 화낼 것 없다고 말할 때도, 관심은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 정치에 가 있었다. 정치적 자치를 위한 노력도 해탈로 가는 길로 보았던 간디였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화내면 무섭다. 공포에 빠지면 더 무서워진다. 분노와 공포를 함께 느끼면 무슨 짓이든 해서다. 최고의 묘약은 1865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40여일 전, 2차 취임사에서 말했던 “누구에게도 원한 없이,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반대편과 소통하면 대통령의 삶에서도 향기가 날 것이고, 계속 자기편만 챙기면 불행의 악취만 더할 뿐이다. 다 한 통속인가? 대법원장의 거짓말과 삼권분립의 훼손에서 오는 썩은 냄새가 천지에 진동한다.
 
이 땅의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한참 부족하다. 자유를 위하다 죽어서 ‘산자야 따르라’고 외치지 못해도, 살아서 헌신하며 그 향기라도 짙어져야 한다.
 
악취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좌우 정치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우리 스스로 진리와 진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진리와 진실은 나를 지켜주고, 사랑은 상대를 더 잘 알게 해 줄 것이라 믿으면서, 성자에게는 못 미치지만 덕을 닦아서 삶의 향기를 피워내자. 단 한 사람의 향기여도 좋다. 그것이 국내에 머물면 K향기가 될 것이고, 온 세상에 가득하면 우주의 향기가 될 것이다.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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