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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꼴 보려고 촛불 들었나" 영끌하던 벼락거지 분노 터졌다

중앙일보 2021.03.06 05:00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 LH(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 앞 빨간 신호등. 연합뉴스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 LH(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 앞 빨간 신호등. 연합뉴스

“집 때문에 ‘영혼을 끌어모은다’던 지인이 ‘영혼이 털린 기분’이라더라.”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의혹에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지인의 말을 빌어 심정을 토로했다. 김씨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반응”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웬만한 인터넷 커뮤니티는 2030의 박탈감으로 ‘도배’되고 있다. “LH 꼴 보려고 촛불집회 참석했나 자괴감 든다”라거나 “국토교통부, SH(서울주택도시공사) 등 개발 정보 다루는 모든 기관 근무자의 부동산을 전수 조사하라”며 성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벼락거지’의 분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가 지난 2일 폭로한 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에 대한 2030의 분노가 심상치 않다. ‘영끌’로 누적돼 압축된 설움이 ‘영털’의 충격에 폭발해 버린 형국이다. 15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재테크 유튜버 포리얼(본명 김준영·29)은 “LH 사태는 단편적 사건에 불과하다”며 “소위 ‘빽’이나 고급 정보가 없으면 계층 역전은 불가능하다는 게 청년들의 지배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2030의 분노에는 자조적인 신조어가 총동원되고 있다. 이번 정부에서 유독 많이 만들어진 말들이다. 폭등하는 집값과 주식을 쫓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 했고, 집과 주식을 가진 친구들 앞에서는 ‘벼락거지’(갑자기 거지 신세가 됐다는 의미) 기분이었던 2030이 LH 직원들의 반칙에 공분을 일으킨 것이다.
 

“2030 이탈 핵폭탄급일 것”

2030의 분노는 정책 책임자와 정치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4월 7일의 서울·부산 시장 선거와 내년 대선 등 선거에 대한 의견 표출이 잇따르는 이유다. 한 네티즌은 “이번 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여당은 추후 선거 기대하면 안 될 듯”이라고 적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이번에 LH 직원들 처벌 못 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큰 2030 유권자들의 이탈은 핵폭탄급일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이번 정권의 최대 악재가 부동산인데 LH 사안에 명운이 달린 듯하다”는 분석도 내놨다.
LH 본사 전경. 연합뉴스

LH 본사 전경. 연합뉴스

LH 직원들의 투기가 현 정권만의 문제겠냐는 지적도 많다. 진보 성향 커뮤니티의 한 이용자는 “몸속에 큰 병이 있을 때 당장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앞선 정부 때 생긴 종양들이 이제야 터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30대 남성 박모씨는 “LH 직원들이 실명으로 대담하게 투기했더라. 부동산 정책을 총괄하는 기관들의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팽배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논란 부추긴 LH 직원 ‘적반하장’ 

LH 직원들이 사들인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소재 농지에 작물이 매말라 있는 모습. 뉴스1

LH 직원들이 사들인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소재 농지에 작물이 매말라 있는 모습. 뉴스1

LH 소속 직원이 지난 4일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LH 직원이라고 부동산 투자하지 말란 법 있나”라는 글을 올리면서 2030의 분노지수는 더 높아졌다. LH 직원은 “내부정보를 활용한 투기인지, 공부를 토대로 한 투자인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판단할 사안”이라고 주장했지만, 네티즌들은 “적반하장”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변창흠 국토부 장관과 LH 임직원의 사과에는 “악어의 눈물”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땅 투기 당시 LH 사장이었던 변 장관이 사과 회견 뒤 “(LH 직원들이) 개발 정보를 알고 땅을 미리 산 건 아닌 것 같다. 신도시 개발이 안 될 거로 알고 샀는데, 갑자기 신도시로 지정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네티즌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사회적 분노는 ‘고발’ 현상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LH 투기 의혹의 시작도 제보였다. 폭로 기자회견을 한 서성민 변호사는 이번 사건 제보와 관련해 “제보자는 ‘LH 직원들이 산 땅이 신도시에 포함돼 놀랐다. 확인해달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서 변호사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자 회견 이후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포괄적으로 정치인과 공직자의 투기 의혹에 대한 제보가 수십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LH 직원들의 100억원대 사전투기 의혹과 관련해 브리핑을 마친 후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뉴스1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LH 직원들의 100억원대 사전투기 의혹과 관련해 브리핑을 마친 후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권력·정보 가진 자에 낙오된다는 불안”

여권은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이틀(지난 3, 4일)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세균 총리도 “서민 주거안정을 위해 헌신해야 할 공공기관의 직원이 이런 부적절한 행위로 국민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국민들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국회에서는 업무 중 취득한 정보로 이득을 챙기면 최대 5배까지 벌금을 물리거나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 등이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의 분노를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LH 사태로 표출되는 공분은 비단 부동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들은 현재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를 지속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 예로 ‘조국 사태’ 등을 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취업·승진 등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지만, 권력과 정보를 가진 자로 인해 낙오될 수 있다는 불안이 사회 전반에 깔렸다”며 “열심히 돈을 벌어도 집을 살 수 있는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영끌’ ‘빚투’ 등 투기성 투자를 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과도 연결된다”고 진단했다.
 
김지혜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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