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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보짠 “펑위샹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는 세태 한심”

중앙선데이 2021.03.06 00:21 726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6〉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들과 젠보짠(앞줄 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들과 젠보짠(앞줄 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국·공내전 시절, 홍색선전기관 신화사(新華社)는 4월만 되면 분주했다. 5월 1일 국제노동절에 발표할 선언문과 구호, 집회, 시위 준비 등 할 일이 많았다. 승리를 앞둔, 1948년 노동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신화사 사장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는 부원들과 태항산 깊숙한 곳에 주둔 중이었다. 관례대로 중공 중앙 소재지 시바이포(西柏坡)에 전문을 보냈다. “노동절이 임박했다. 승리가 임박한 중요시점이다. 발표할 내용 중 중요사항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마오쩌둥과 중앙서기처 서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 지휘부는 랴오의 요청에 신경을 썼다. “국민당 정권의 붕괴와 신중국 탄생을 앞두고 우리의 주장과 신정권의 청사진을 알릴 때가 됐다”며 포고문 초안을 작성했다.
 

펑 장례 관련 국민당 처사에 울분
“장제스는 국가 지도자 자격 상실”

저우언라이 권유로 공산당 입당
비밀 당원으로 국민당 요원 접촉
베이징대 부총장 취임날 첫 공개

마오·저우, 신정권 포고문 작성 지시
 
자택 문전에서 부인, 자녀, 손녀, 손자들과 함께한 젠보짠. [사진 김명호]

자택 문전에서 부인, 자녀, 손녀, 손자들과 함께한 젠보짠. [사진 김명호]

“5·1구호(五一口號) 초고”는 총 24조였다. 내용도 종전과 큰 차이 없었다. 각계에 경의를 표하고 안부나 묻는 정도였다. 초안을 본 마오쩌둥은 당대의 명문장가였다. 5조가 맘에 안 들었다. “공인(工人·노동자)계급은 중국인민혁명의 영도자다. 신중국의 주인공은 공인계급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해 하루빨리 최후의 승리를 실현하자”를 “각 민주당파와 인민단체, 사회 명망가(賢達)들이 정치협상회의를 열고, 토론과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해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자”로 수정했다. “중국인민의 영수 마오 주석 만세”는 눈에 거슬렸다. 직접 붓으로 지워버렸다.
 
4월 30일, 중앙서기처 확대회의는 마오쩌둥이 수정한 “5·1 노동절 기념구호”를 통과시켰다. 구호가 전파를 타자 홍콩과 해외의 민주인사들은 연합정부 수립을 제의한 마오의 절묘한 한 수에 열광했다.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유지를 계승한 국민당 좌파와 군소정당 대표들은 귀국을 서둘렀다. 마오쩌둥은 구호선포 당일 홍콩에서 활동 중인 국민당 혁명위원회(民革) 주석 리지선(李濟深·이제심)과 민주정당동맹(民盟)을 이끌던 선쥔루(沈鈞儒·심균유)에게 친필 서신을 보냈다. 두 사람의 의견을 구했다. “회의 장소는 하얼빈을 제의한다. 시간은 금년 가을이 적합하다.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와 중국민주동맹 집행위원회,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달 안으로 연합성명을 발표하자.” 민맹과 민혁은 중공을 뒤에 넣은 것 보고 겸손함에 감동했다. 온갖 군소정당과 무당당파 인사, 미주와 동남아 화교 지도자들의 중공 지지 선언이 줄을 이었다.
 
중국과학원 사회과학부 성립대회에서 총리 저우언라이(왼쪽 첫째)와 환담하는 젠보짠(왼쪽 둘째). 1955년 6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국과학원 사회과학부 성립대회에서 총리 저우언라이(왼쪽 첫째)와 환담하는 젠보짠(왼쪽 둘째). 1955년 6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민혁 주석 리지선은 중공의 통전대상 1호였다. 국민당 내의 지위도 군사위원회 부주석 펑위샹(馮玉祥)보다 높았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의 인연도 뿌리가 있었다. 장이 황푸군관학교 교장일 때 부교장이었다. 북벌 시절엔 총참모장으로 총사령관 장제스를 보좌했다. 정변을 일으킨 장이 공산당을 도살할 때도 모른 체하지 않았다. 광저우(廣州)에서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광시(廣西)파의 영수였다. 딸의 구술을 소개한다. “부친과 장제스는 광둥(廣東)과 광시, 양광의 군정 대권을 놓고 모순이 발생했다. 두 차례나 당에서 제명당했다. 일본 패망 후 장의 초청으로 난징(南京)에 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유명한 시국 선언서를 발표하고 장과 철저히 결별했다. 장이 체포령을 내리자 홍콩으로 몸을 피했다. 국민당 좌파와 연합해 민혁을 결성했다. 민혁의 구성원은 쑨원의 옛 친구와 추종자였다. 뉴욕에 있던 펑위샹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펑의 소개로 가까워진 역사학자 젠보짠(翦伯贊·전백찬)도 홍콩의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펑위샹의 비보를 듣고 두 분이 통곡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젠보짠은 5·1구호 이후 펑위샹의 부인과 함께 동북으로 갔다. 한발 늦게 베이징에 도착한 부친은 신중국 초대 국가 부주석을 지냈다. 매달 정부에서 지급받는 돈이 마오 주석보다 많았다. 부친은 젠이 중공 비밀당원인 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젠, 문혁 발발 2년 뒤 극단적 선택
 
고향을 방문, 학생들에게 역사 얘기 해주는 젠보짠. [사진 김명호]

고향을 방문, 학생들에게 역사 얘기 해주는 젠보짠. [사진 김명호]

펑위샹의 사망 소식을 접한 젠보짠은 국민당의 처사에 울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홍콩 언론에 세 차례 기고했다. “처형당한 한간(漢奸)의 추도회를 여는 것들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는 세태가 한심하다. 대한간이 감옥에서 사망하자 고관들의 애도가 가관이다. 조문객까지 파견한 장제스는 국가 지도자 자격을 상실했다.” 문혁 발발 2년 후인 1968년, 펑위샹 사망 20년 후, 젠보짠은 부인과 함께 수면제를 복용하고 세상을 떠났다. 홍위병들도 소문처럼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집 안에 연금 중이던 젠이 어디서 다량의 수면제를 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도 젠의 자살을 애통해했지만, 젠을 심문한 홍위병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지금도 살아있다.
 
젠보짠은 1937년 국민정부 수도 난징에서 저우언라이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저우만 아는 비밀 당원이었다. 1961년, 베이징대학 부총장으로 취임하는 날 자신이 당원임을 처음 밝혔다. 20여년간 비밀당원 생활하다 보니 국민당 요원들과 접촉이 빈번했다. 문혁 시절은 살벌했다. 오해를 피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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