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텍사스 정전 사태는 왜?

중앙일보 2021.03.04 00:17 종합 27면 지면보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지난달 중순 미국 텍사스주에 기록적 한파가 몰아치면서 300여만 가구와 사무실이 정전됐다. 수일간 지속한 정전 사태로 주민 40명 이상이 숨졌다. 정전 사태 와중에 일부 주민들은 평소의 100배 이상 많은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았다. 지난달 전기요금이 1만7000달러(약 1900만원)에 달하는 주민도 있었다.
 

20년 장기집권 공화당 체제 텍사스
연방정부 규제피해 전력망 독자화
표 의식한 가덕신공항법 졸속 처리
국민이 그 피해 고스란히 떠안게 돼

공화당이 장악한 텍사스의 정치인들은 정전 사태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레그 애벗 주지사는 정전 사태가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탓이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텍사스주의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전체 발전량의 23% 수준이다. 전력의 70%를 차지하는 천연가스·석탄 화력발전소도 상당수 가동을 멈췄다는 걸 고려하면 애벗 주지사의 발언은 진보 진영에 책임을 돌리려는 가짜뉴스에 해당한다고 미 언론은 지적했다. 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는 한파가 닥치자 주민 고통을 외면한 채 가족과 함께 멕시코 휴양지 칸쿤으로 휴가 간 사실이 들통나 주민들의 울분을 샀다.
 
압권은 댄 패트릭 부지사다. 그는 지난달 24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고지서의 깨알 글씨를 읽어야만 한다”며 폭등한 전기요금에 대한 책임이 주민들에게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전기요금 폭탄을 맞는 가정은 고정 요율이 아닌 변동 요율을 택했기 때문이므로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변동 요율은 전력 수요에 따라 요금이 변하는데 혹한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자 요금도 치솟았다. 현지 언론 댈러스모닝뉴스는 “그는 텍사스 공화당이 잘못됐다는 걸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보도했다. 패트릭은 지난해 3월 미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하자 ‘고령자들은 손주들을 위한 경제 살리기를 위해 죽음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는 취지로 말해 비판을 자초하기도 했다.
 
서소문 포럼 3/4

서소문 포럼 3/4

텍사스 정전 사태는 진영 정치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텍사스는 지난 20년 이상 사실상 공화당 일당 체제였다.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텍사스 주 공화당 정치인들은 연방정부 규제를 피하기 위해 연방 전력망에서 텍사스주 전력망을 제외하고 전력시장을 자유화했다. 민간 전력회사들은 단기 이익에 치중해 혹독한 날씨에 대비한 시설 투자에 인색했다. 텍사스는 10년 전에도 심한 눈 폭풍 때문에 전력망의 3분의 1가량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정전 사태를 조사한 연방 감독기관은 혹한 대비 시설을 갖추고 텍사스 전력망을 연방 전력망에 연결할 것을 권고했으나 텍사스 정치인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런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하면 정치권이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설 거라고 기대할 수 있지만, 앞으로도 이런 사태가 재발할 우려가 크다고 주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7일 보도했다. 텍사스 공화당 정치인들이 큰 정부와 규제에 거부감이 커 대규모 정전 사태를 예방할 수 있는 조치를 도입하기 꺼린다는 설명이다. 텍사스 민주당이 지리멸렬해 주 정부를 견제하기 힘든 상태에서 2024년 대선 출마를 꿈꾸는 애벗 주지사가 바이든 행정부와 차별화하기 위해 시장 친화적 행보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영 정치가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은 한국에서도 적지 않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6일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국토교통부 추정으로 28조6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불과 석 달 만에 졸속 처리했다. 오는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 내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부산 표를 얻기 위한 꼼수라 할 수 있다. 안전성·경제성 등 숱한 문제에도 선거용으로 강행하는 가덕도신공항은 두고두고 국가와 국민에게 짐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악인 한·일 관계도 진영 정치의 결과다. 문 대통령은 지난 4년간 표심에 유리하다 판단해 반일 정서를 부추기는 발언을 이어오다 지난해 말부터 일본에 화해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3·1절 기념사에서도 “일본과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으나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에서 구체적 해법은 제시하지 않아 일본 정부의 반응은 싸늘하다. 한·일 관계 악화를 방치하던 문 정부가 바이든 행정부 들어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자 일본 정부는 진정성을 의심한다.
 
마르크스는 “현실의 삶을 보지 못하는 이념은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든다”고 말했다. 진영 논리에 갇혀 표만을 바라보는 정치는 단기적으론 성과가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현실의 검증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문제는 국민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