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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태우며 나를 잊었다, 겹겹의 시간이 작품이 되었다

중앙일보 2021.03.04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김민정의 한지 콜라주 작품. 더 스트리트(The Street). [사진 갤러리현대]

김민정의 한지 콜라주 작품. 더 스트리트(The Street). [사진 갤러리현대]

지난해 12월 17일 뉴욕타임스는 ‘(뉴욕에서) 지금 당장 봐야 할 4개의 전시’ 제하 기사에서 한국 아티스트 김민정(58)을 소개했다. 뉴욕 첼시의 힐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김민정 (Minjung Kim)’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전시 중인 작가였다. 신문은 그가 ‘한지(hanji)’에 작업한 ‘산(Mountain)’ 연작 등을 소개하며 "심오하게 아름다운 (profoundly beautiful)”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세계가 주목한 한지작가 김민정
대표작·신작 30여점 ‘타임리스’전

“붓으로는 표현 못할 선을 찾아
이젠 한지가 내 몸처럼 느껴져”

김민정은 최근 몇 년 사이 세계 미술 무대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한국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이 2017년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데 이어 2018년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 2019년 독일 노이스 랑겐 파운데이션 등이 앞다퉈 그의 개인전을 선보였다. 세계적인 출판사 파이돈은 최근 펴낸 미술 전문서 『비타민 D3: 오늘의 동시대 드로잉 베스트』에 김민정을 소개했다.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지금은 미국과 프랑스를 거점으로 한지를 재료로 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다.
 
앵무조개(Nautilus). 불에 타 그을린 한지의 가장자리가 모여 이룬 선들이 섬세하다. [사진 갤러리현대]

앵무조개(Nautilus). 불에 타 그을린 한지의 가장자리가 모여 이룬 선들이 섬세하다. [사진 갤러리현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그의 대표작과 신작 등 총 30여 점을 소개하는  ‘타임리스(Timeless)’전이 열리고 있다.  2017년 갤러리현대 전시 이후 4년 만의 자리다. 한지 위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회화와 한지 조각을 콜라주해 재구성한 그의 작품들은 더욱 깊어져 돌아왔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보는 관람객들은 그의 한지 콜라주 작품에서 ‘불’이라는 재료를 떠올리지 못한다. 커다란 화면 앞으로 다가서야 또렷이 보이는 선(線)들의 정체가 탄성을 자아낸다. 한지를 일정한 형태로 잘라 향불로 가장자리를 태우고 그을린 뒤 화면 위에 재구성한 작품이라니.
 
2000년대 초부터 불로 한지를 그을리는 작업을 해온 그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내게 더 의미 있는 것은 그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 작업을 가리켜 많은 분이 ‘노동집약적’이라며 놀란다. 하지만 누구나 노동하지 않나. 그 자체가 작품의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노동하는 과정의 상태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집중한다는 것은 나(에고)를 지우는 것이다. 극도의 집중력과 인내력, 정성으로 1㎜가량의 한지를 태우며 나는 시간의 흐름도, 내 마음의 번뇌도 잊는다. 굴곡진 내 삶도 그때 비로소 평화를 찾는다.”
 
김민정

김민정

종이는 그와 인연이 깊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광주에서 작은 인쇄소를 운영했고, 그는 거기서 나오는 폐지를 갖고 딱지를 접으며 놀았다. 아홉 살부터 수채화와 서예를 배운 그는 홍익대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의 ‘유별난’ 이력은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에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미술이 궁금해 이탈리아를 선택했다”는 그는 "오히려 한국에서 멀리 떠나간 그곳에서 남의 것을 따라 하기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해온 것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한지와 먹, 붓이 새롭게 보였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한지는 재료 그 이상의 의미다. "한지는 연약한 듯하지만 수천 년 세월을 견딜 만큼 강인하다. 마치 살아 숨을 쉬는 것 같다”며 "한지로 30여 년 작업하다 보니 종이 자체가 이젠 내 몸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소개한 새로운 연작 ‘타임리스(Timeless)’ 에서 그의 선은 더욱 섬세하고 깊어졌다. ‘타임리스’ 연작을 가리키며 그는 "극도의 집중력이 집약된 작품이다. 다시는 그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까지 나를 밀어붙였다”고 했다.
 
황금비례로 유명한 ‘앵무조개(Nautilus)’는 보는 이를 빨아들일 듯이 나선형으로 휘감겨 있고, ‘더 워터(The Water)’ 에선 거대한 물줄기가 역동적으로 솟구친다. 미세하게 그을린 얇은 한지 조각이 촘촘하게 겹치고 겹쳐져 투명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그는 "한지를 태우는 과정에서 내 선을 찾았다. 붓으로 그려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선을 여기서 만났다”고 말했다.
 
한지에 먹으로 그린 수묵화 ‘산(Mountain).’ [사진 갤러리현대]

한지에 먹으로 그린 수묵화 ‘산(Mountain).’ [사진 갤러리현대]

가운데가 뚫린 원형 색지를 겹쳐 꽃 형상으로 만든 ‘비움과 채움(Pieno di Vuoto)’ 연작, 마치 꽃밭을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형상의 ‘더 스트리트(The Street)’ 연작은 먼저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작품들이다. ‘비움과 채움’이 생동하는 오방색과 원형의 조화를 보여준다면, ‘더 스트리트’는 곱디고운 파스텔 색조가 돋보인다. ‘더 스트리트’를 가리켜 "꽃이 아니라 우산으로 가득 찬 태국의 거리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추상화한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작품의 영감은 우리 주위에 떠다니고 있고, 그것은 나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상상의 나래를 펼 때 찾아온다. 생각이야말로 영감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전시가 개막하자마자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프랑스 생폴드방스로 돌아간 그는 "최근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수 백명이 순식간에 늘어나  깜짝 놀랐다”며 "한국에서의 관심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미술에서 ‘아름다움’은 언급이 기피되는 주제가 됐다. 하지만 나는 작품을 통해 문제를 나누기보다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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