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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남편과 혈투 끝에 도망쳤다 며칠후 다시 붙잡힌 도둑

중앙일보 2021.03.03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81)

뉴스에 폭행과 강도사건을 떠들어대도 남의 일이려니 했다. 다닥다닥 길게 붙어선 개집보다 못한 움막집에 도둑이 들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진 pxhere]

뉴스에 폭행과 강도사건을 떠들어대도 남의 일이려니 했다. 다닥다닥 길게 붙어선 개집보다 못한 움막집에 도둑이 들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진 pxhere]

 
책을 읽다가 오래전 어느 여름날이 생각난다. 이웃들과 기차여행 떠나기 전날 밤 도둑이 들어 온 사건이다. 내 맘대로 뭉뚱그려 남의 집을 침입했으니 도둑이라고 하련다. 기분이 들떠서 자정이 넘어도 잠이 쉬 오지 않았는데, 마침 TV에선 ‘황야의 무법자’가 방영되고 있었다. 보다가 잠이 든 지 한 시간도 안 된 시간이었다.
 
꿈인가 싶었다. 뉴스에 폭행과 강도사건을 떠들어대도 남의 일이려니 했다. 다닥다닥 길게 붙어선 개집보다 못한 움막집에 도둑이 들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날 우리 집에 온 도둑은 어디서 다쳤는지 한쪽 손에선 피가 줄줄 흐르는, 술에 만취한 젊은 청년이었는데 청춘의 고뇌를 자기 혼자 다 짊어진 듯 취해 헤매다가 쪽문 열린 첫 집으로 그냥 돌진, 정말이지 그냥…. 우리가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이다.
 
이미 죽은 듯한 모습의 남편과 아이들이 보이고, 무릎을 짓누르고 올라탄 낯선 이의 눈을 마주했을 때의 공포감이란, 그 기억은 지금도 떨린다. 입을 막아 숨을 쉴 수 없으니 이미 벙어리가 되었다. 폭행이란 단순히 구타를 뜻하는 것만이 아님을, 무방비 상태로 당하는 성폭행 직전의 순간이었다. 살아온 시간들이 일촌광음의 파노라마가 되어 지나갔다. 하필 입고 자던 반바지 호크가 열리지 않아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희미한 신음에 놀라 깬 남편의 모습은 괴물이 되어 둘이 엉켜 엎어지고 자빠졌다. 그 당시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열심히 살아도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도 젊은 세대였다. 15세의 나이로 집안 살림을 떠안아야 했던 가난한 시절, 나무 팔아 산 보리쌀을 모두 빼앗아간 도둑에 대항하며 죽을힘을 다해 다시 찾아와 가족을 먹여 살렸던 사람. 귀신까지 이겨낼 힘을 갖기 위해 해병대를 지원해 간 남자. 그는 개병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죽자사자 맞서 싸웠고 돈을 빼앗기지 않을 만큼의 힘을 길러 장가도 갔다. 열심히 살았지만 다시 폭삭 망해 막장이라는 탄광에 굴러 들어온 막장 인생이다. 토끼 같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족이란 이름으로 겨우 화를 잠재웠는데 그 청년이 불을 지핀 것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볼링공처럼 굴러다니던 요강, 이불에 찍힌 시커먼 공룡 발자국. 붉은 피, 아수라장이었다. 남편이 상대방의 널브러진 모습에 잠시 숨을 고르는 찰나 도둑은 기름 팬에 콩 튀듯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이웃들이 놀라 하나둘 나오면서 그들과 함께한 쫓고 쫓기는 추격전, 엉망진창이 된 휴가, 정신과 치료 등 그때의 드라마틱한 시간은 여기에 다 쓰려면 너무 많다. 쫓기는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냈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면 뒤따르는 사람이 우사인 볼트라 해도 못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그날의 사건은 미결로 남았다.
 
연약한 나무라도 바람에 쓰러졌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뿌리가 썩은 나무는 그대로 죽지만 부러진 나무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무로 클 수 있다.[사진 piqsels]

연약한 나무라도 바람에 쓰러졌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뿌리가 썩은 나무는 그대로 죽지만 부러진 나무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무로 클 수 있다.[사진 piqsels]

 
사람은 무섭고 힘든 일을 당하면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평생 병으로 남아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사람을 마주 보지 못했다. 심사숙고하던 남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회사에 휴가를 냈다. 주위에선 경찰에 신고하라 했지만 안 했다. 며칠 후 남편이 붙잡아 온 남자는 너무 여리고 순한 청년 그것도 학생이었다. 이불에 찍힌 신발 자국과 피가 뚝뚝 흐르던 팔의 깁스가 증거가 되었다. 큰소리로 호통치던 남편이 믿음직스러웠다. 남편은 피 끓는 젊은 시절의 아픔과 고통을 알기에 많은 삶의 이야기를 했다. 그 청년은 부모와 함께 다시 찾아와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고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셨다. 나는 더 이상 치료를 안 받아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연약한 나무라도 바람에 쓰러졌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뿌리가 썩은 나무는 그대로 죽지만 부러진 나무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무로 클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새로운 가지로 접을 붙여 살리는 거다. 조금만 사랑을 줘도 용을 쓰며 새순을 피워낸다. 너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순이다. 네가 어떤 나무로 변하는지 나는 너를 지켜볼 거다.“
 
지금 책을 읽으며 마주한 대목은 남편이 그때 그 청년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이다. 남편은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수십 년 전 그 청년에게 해주었으니, 남들이 뭐라 해도 남편은 참 멋지게 살다 간 남자다. 젊은 시절 한 번의 실수가 밑거름이 된 그도 어느새 50대 중반일 텐데 잘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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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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