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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들게 해줘 고마워"…'못 배운 한' 풀어주던 양원초 마지막 졸업식

중앙일보 2021.02.27 08:00
"언니, 공부하느라 고생했어. 졸업 축하해."
지난 23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평생교육시설 양원초등학교. 6학년 4반 교실의 낡은 초록색 칠판 위에 '축 졸업장 수여'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평균연령 77세인 '늦깎이 졸업생' 13명은 한손엔 졸업장, 한손엔 꽃다발을 들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졸업식을 마친 뒤에도 한참을 교실에 머물다 "또 보자"고 수차례 약속한 뒤에야 교실을 떠났다. 담임 선생님은 졸업생 한 명, 한 명을 배웅하며 교실을 지켰다. 평생교육시설인 양원초의 마지막 졸업식이 열린 날이어서다.
지난 23일 열린 서울 마포구 평생교육시설 양원초등학교 6학년 4반 졸업식. 4반 졸업생은 총 33명이지만 코로나19 예방 조치로 22일, 23일 두 조로 나누어 졸업식을 진행했다. 평소에는 인근 대강당을 빌려 전교생이 한복을 입고 졸업식을 했다고 한다. 사진 양원초 제공

지난 23일 열린 서울 마포구 평생교육시설 양원초등학교 6학년 4반 졸업식. 4반 졸업생은 총 33명이지만 코로나19 예방 조치로 22일, 23일 두 조로 나누어 졸업식을 진행했다. 평소에는 인근 대강당을 빌려 전교생이 한복을 입고 졸업식을 했다고 한다. 사진 양원초 제공

 
양원초는 무교육자 성인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정규교육과정과 봉사·문화활동 등을 제공하는 교육시설이다. 올해 졸업생 210명을 포함해 2005년 개교 이래 총 300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최근 교장 선생님의 고령화 등 학교 사정으로 폐교를 결정했다. 마지막 졸업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탓에 축하객 없이 학생들과 선생님들만 참석해 조용히 진행됐다.
 
이날 전별사를 발표한 반장 이양례(72)씨는 "어릴 적 학교 담 밖에서 교실 안 풍금 소리에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며 "배울 때 배우지 못한 저희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유적지·박물관 탐방, 동화 구연, 팝송대회, 백일장, 나의 주장 발표대회, 노래자랑 등 학교에서 경험한 추억을 하나씩 읊었다. 이씨는 "젊은 시절 공사판도 가보고 파출부로 일하다 늦게 학교에 왔다"며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좋아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학교생활을 하며 목표도달상·덕행상·우등상 등 7개의 상장을 받았다.
코로나19 유행 전인 지난 2019년 영어 수업을 받는 양원초 학생들의 모습. 사진 양원초 제공

코로나19 유행 전인 지난 2019년 영어 수업을 받는 양원초 학생들의 모습. 사진 양원초 제공

 
최고령 졸업자인 이난순(89)씨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서 4년 내내 통학을 해 '끈기상'을 수상했다. 교가를 부르는 동안 눈물을 보인 그는 "수학 문제를 맞혀 동그라미를 받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며 "처음엔 고생했지만 '나라고 못할 것 있냐'는 생각으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은행에 가면 글을 몰라 기가 죽었는데 이제는 동사무소나 은행을 혼자서 잘 다닌다"고도 했다. 이씨는 서울 미아리 길음시장과 봉천동에서 39년간 건어물 노점상을 운영하며 삼 형제를 길렀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폐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날 마지막까지 교실을 지킨 '봉사상' 수상자 김윤자(67)씨는 "양원초가 없었으면 어디서 이걸 배웠을까 싶다"며 "코로나 탓에 듣지 못한 마지막 6학년 수업들, 가지 못한 수학여행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쉽다"고 전했다. 이난순씨 역시 "늦게라도 학교를 알게 돼 다행이지만, 돌아올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했다.
 
류웅상(65) 담임선생님은 "성인학교 학생들은 모두 '가르쳐만 주세요'하는 눈빛으로 학업에 임했다"며 "나를 가치 있는 선생님으로 만들어준 학생들에게 감사 인사 전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초등교사로 명예퇴직한 류씨는 지난 2010년부터 양원초에서 교편을 잡아 왔다.
 
지난 2019년 양원초 강당에서 열렸던 동화구연대회. 사진 양원초 제공

지난 2019년 양원초 강당에서 열렸던 동화구연대회. 사진 양원초 제공

이날은 졸업식과 함께 교무실·교실 철거 공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학교 자산과 교무실 자료들은 같은 재단의 일성여자중학교로 옮겨졌다. 양원초는 이선재(85) 교장이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개인 자격으로 운영해왔다. 하지만 현행법상 다른 사람이 학교를 이어받게 될 땐 반드시 학교를 법인화해야 한다. 이에 부담을 느낀 학교 측이 폐교를 결정했다. 양원초 폐교 후 서울에 남는 초등학교 자격 평생교육시설은 서현초 하나다.
 
서울시 서부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양원초는 학급 수가 많고 학교 형태를 한 교육시설이어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며 "법인화 요청을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교육청 입장에서도 아쉽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학교 형태'는 아니지만, 교육부에선 여러 기관을 통해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며 "무교육자에 대한 초등 교육시설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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