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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산티아고 700㎞ 순례자 ‘목마른 영혼’ 채워줘

중앙선데이 2021.02.27 00:20 725호 24면 지면보기

와글와글 

와글와글 2/27

와글와글 2/27

남들은 웃고 있는데 혼자서 진한 고독감을 느낀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실직, 실연, 실패라는 이름의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거나 인간관계의 상실까지 겹친다면 하루하루 사는 게 고역이다. 가끔 자기 자신에게 진지한 질문도 던진다. “이곳이 정말 내가 있을 곳인가?”
 

코엘료 『순례자』
상처 치유, 새 출발 위한 순례 길
포도주가 영혼의 갈증 해소해주고
지친 육체 지탱하는 지팡이 역할

“고문 같은 여행이 기쁨으로 변화”
순례 끝날 즈음 전업 작가 결심

그럴 때는 혼자 걷는 게 최고다. 스페인 서쪽 땅끝마을 피니스테레는 유럽 도보 여행자들에게 인기 높은 곳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다양한 생선이 잡히는 항구이며 싱싱한 정어리와 통오징어, 문어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명소이기는 하지만, 도보 여행자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대서양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바위 언덕 위에 고고하게 올려져 있는 ‘순례자의 신발’ 때문이다.
 
이곳은 유명한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점인 산티아고에서도 서쪽으로 90㎞ 떨어진 곳에 있다. 순례자들 대부분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하지만, 일부는 피니스테레의 ‘순례자의 신발’까지 더 걸은 다음 그동안 신고 있던 신발을 태워 버린다. 과거의 나와 작별하고 또 다른 나로 태어나겠다는 장엄한 의식(儀式)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중세시대부터 1200년 동안 이어져 온 가톨릭 순례의 길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다양한 이유로 찾는다. 상처를 잊기 위해,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그저 도보여행을 즐기기 위해 그 길을 걷는다. 그렇게 된 데는 작가 한 명의 영향이 컸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그 주인공이다.
 
코엘료가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순례의 길을 떠난 것은 1986년. 여행을 떠나기 전 두 권의 책을 쓰기는 했어도 독자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아 작가의 길을 포기할까 망설이며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를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까지 약 700㎞의 도보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한 뒤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 귀국하여 다음 해 그 체험을 바탕으로 발표한 소설이 『순례자』다. 순례길의 안내자 페트루스의 입을 빌어 작가는 고된 여행과 인생의 공통적인 의미를 이렇게 전한다.
 
“당신은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처음엔 여행이 고문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젠 그 여행이 기쁨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지요. 그것은 탐색과 모험이 주는 기쁨입니다.”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순례자』는 산티아고를 향해 ‘자기만의 검(劍)’을 찾아 떠난 사나이가 겪는 마법 같은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예찬이다. ‘쉴 수 있는 침대와 한잔의 포도주가 있는 숙소’가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것인지 강조한다. 이 소설에는 모두 32회나 포도주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포도주는 값비싼 빈티지나 지적인 과시가 아니라 지친 육체를 지탱해 주는 지팡이 혹은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소박하고도 영적인 음료다.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포도 경작지 보유국답게 순례길 곳곳에서 포도주 시음할 기회가 많은데, 그중 목마른 순례자들을 위해 생수와 와인을 24시간 무료로 제공하는 이라체 수도원 벽의 수도꼭지가 인기 높다. 피레네에서 바스크 지방과 리오하 지역을 거쳐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은 육체적으로 혹독한 고통을 수반하지만, 곳곳에 맛집이 있어 ‘미식가의 길’(Gourmet Camino)이란 별명도 있을 정도다. 이베리코 베요타 등급의 하몽, 대구찜 ‘바칼라우’, 바스크 지방의 꼬치 간식 ‘핀초’를 비싸지 않게 즐길 수 있으며, 값싸고 싱싱한 올리브와 포도주가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다. 12세기 최초의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서인 『코덱스 칼릭스티누스』에도 이라체 수도원 옆에 있는 에스테야를 가리켜 “맛있는 빵과 훌륭한 포도주와 고기와 생선을 맛볼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라고 했음을 코엘료는 전하고 있다.
 
『순례자』에는 ‘감미로운 리오하산 포도주’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리오하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재배지역이며 여름철 하로 와인 축제가 유명하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답게 이 소설에는 꿈과 자유를 갈구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와 용기, 지혜의 문장이 가득하다.
 
“펜과 붓과 악기와 도구를 들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이미 누군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놀라운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이다. 그러나 하찮은 것들 안에 영감을 쏟아 넣기 위해 펜과 붓과 악기와 도구를 손에 들고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이들을 더욱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 이룬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예화를 소개함으로써 포도주를 기적의 상징으로 암시한다. 여행이 끝날 즈음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 1년 뒤 『순례자』를 발표한다. 다시 1년 뒤에 발표한 소설이 『연금술사』, 그를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도 포도주는 양치기 산티아고의 목마른 영혼을 채워 주는 친구로 종종 등장한다. 또 다른 작품 『브리다』에서는 포도주를 인생에 비유하고 있다.
 
“나쁜 와인을 맛본 사람만이 좋은 와인의 맛을 아는 법이지.”
 
그의 작품들에는 폭력이나 유혈이 흐르는 자극적 장면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170개국에서 83개 언어로 번역되어 합계 3억2000만 권이나 팔렸다. 와인이 글을 만나 포도주의 기적이 일어났으니 진정한 ‘와글와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환갑을 맞아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번 더 걸었다. 왜 고통스럽게 또 걷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되찾기 위해서!” 자유를 원한다면 과거의 신발을 불태워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였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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