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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위안스카이 협박, 조선 근대화의 황금 기회 봉쇄하라…한국 외교의 반면교사

중앙선데이 2021.02.27 00:02 725호 14면 지면보기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청나라 젊은 관리의 총독 행세, 조선을 농락하다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때 쓴 ‘愴懷袍澤(창회포택·생사를 같이한 전우를 슬퍼하다)’ 휘호. 서울 연희동 한성화교중학 교내 오장경 사당에 걸려 있다.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때 쓴 ‘愴懷袍澤(창회포택·생사를 같이한 전우를 슬퍼하다)’ 휘호. 서울 연희동 한성화교중학 교내 오장경 사당에 걸려 있다.

한반도가 요동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압박한다.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중국 국가주석은 한·미동맹을 깨려 한다. 해양과 대륙 세력의 대치다. 한국은 지정학적 갈등의 한복판이다.
 

‘원림’ 박물관 “조선 평정한 인물”로
서울에 남긴 글씨엔 중화의 위세

조선 부국강병의 길 통제·차단은
위안스카이의 한반도 지배 본능
시진핑 “한국은 중국 일부”에 주입

문재인 외교, 대륙에 자발적 편입
미·중 대치 속 지정학적 패착이다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사진.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사진.

중화(中華)의 습성은 위압이다. 주변국은 움츠린다. 19세기 말 조선 풍광이다.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거기 있었다. 그는 식민지 총독처럼 행세했다. 임오군란(1882년)~청일전쟁(1894년)까지다. 나이 23세부터다. 그 12년은 ‘홀로서기’의 마지막 골든타임이었다.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개화로 갈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교활한 훼방꾼이다. 조선은 근대 흐름에서 낙오했다. 전쟁 패배로 중국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 후 일본의 침탈은 수월했다. 망국은 위안스카이의 군림 시절 시작됐다.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 최고 권력자 대원군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 중 도봉산 ‘望月寺(망월사)’의 현판. 양편 글귀는 ‘駐韓使者袁世凱(주한사자원세개), 光緖辛未仲秋之月(광서신미중추지월·1891년 가을)’.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 중 도봉산 ‘望月寺(망월사)’의 현판. 양편 글귀는 ‘駐韓使者袁世凱(주한사자원세개), 光緖辛未仲秋之月(광서신미중추지월·1891년 가을)’.

나는 위안스카이(1859~1916.6)를 찾아다녔다. 코로나19 이전부터다. 한국에 있는 그의 유적(遺跡)도 추적했다. 중국 대륙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 북관구. 수도 베이징에서 남쪽 500여㎞(고속철 2시간30분) 거리다. 그곳은 그의 고향. 그의 광대한 무덤 ‘원림(袁林)’이 있다. 대지 9만여㎡, 남북 2㎞. 비석(높이 5.5m, 폭 1m)은 예사롭지 않다. 받침대는 용의 머리, 거북의 몸, 뱀 꼬리. ‘大總統袁公世凱之墓(대총통 원공세개지묘)’다. 그는 중화민국 초대 총통, 최후(중화제국 100일)의 황제였다. 제국 부활의 야욕은 좌초했다. 그 후유증으로 병을 앓고 숨졌다.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조선 감국대신 때 모습.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조선 감국대신 때 모습.

나는 원림의 박물관에 들어갔다. 그의 57년 삶은 영욕(榮辱)의 곡절이다. 사진·도표가 펼쳐져 있다. 그는 한족 명문가 출신. 과거에 낙방했다. 무인으로 입지를 바꾼다. 관광해설사가 정리한다. “위안스카이는 삼국지 ‘난세의 간웅(奸雄) 조조’와 비유된다. 그 삶은 배반과 음모, 도발과 결행, 혁신과 수구 사이를 오갔다. 청년시절 조선 경략을 발판으로 대륙을 휘어잡았다.”
 
그의 두 번째 삶의 무대가 조선이다. 전시물은 이렇다. “駐使朝鮮 初露鋒芒(주사조선 초로봉망, 조선주재 사절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다). 임오병변(兵變)과 갑신정변(政變)을 평정했다.” 1882년 임오년 7월 구식군대가 궐기했다. 민비(명성황후) 척족 정권의 부패에 대한 항거다. 흥선대원군이 8년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민씨 조정은 청국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엔 조선에 대한 종주권 회복·영구화의 기회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청나라 광동수사(水師)제독 오장경(吳長慶)군대의 출동은 신속했다. 8월 20일 북양함대 군함 4척(육군 3000명 탑승)이 남양만(화성시 송산면)에 진입했다. 청군의 군란 진압은 전격적이었다. 대원군은 중국 톈진(天津)으로 납치당했다. 군란 수괴로 압송됐다. 조선 최고 권력자의 어이없는 몰락이다. 중급 무장 위안스카이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는 청국 실세 이홍장(李鴻章·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의 신임을 확보했다. 대원군은 바오딩(保定)의 직례총독부에 유폐됐다. 〈중앙SUNDAY 2018년 8월 4일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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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청국 무역장정, 최악의 불평등 조약
 
임오군란 때 청나라로 납치당한 대원군의 모습(강제 촬영).

임오군란 때 청나라로 납치당한 대원군의 모습(강제 촬영).

청국은 조선의 멱살을 잡았다. 그것은 서양에 당한 치욕의 분풀이다. 군란 평정후 중국과 조선은 신조약을 맺었다(1882년 11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다. 이양자 동의대 명예교수의 설명이다(『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양국의 명목상 조공(朝貢)관계가 실질적인 종주·속방의 관계로 재구성됐다.” 장정은 최악의 불평등 조약. 청나라는 조선경제 공략에 나섰다. 1884년 청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격화됐다. 오장경 주둔군의 절반이 귀국했다. 그 직후(7월) 오장경은 병사했다. 그 상황은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김옥균 주도의 개화독립당은 반청(反淸)개혁을 외쳤다. 그해 12월 4일 거사가 갑신정변. 일본(군대 200명)의 지원은 미약했다. 위안스카이의 청군(1500명)이 압도했다. 정변은 삼일천하의 실패다.
 
서울 수유동 이준 열사 묘역 조형물에 위안스카이의 만시(輓詩·추모)가 붙어 있다. 慰廷(위정)은 그의 자(字).

서울 수유동 이준 열사 묘역 조형물에 위안스카이의 만시(輓詩·추모)가 붙어 있다. 慰廷(위정)은 그의 자(字).

중화의 한반도 지배 야심은 대담해졌다. 1885년 10월 이홍장의 조선 압박은 교묘하다. 현장감독관은 위안스카이. 그에게 긴 이름의 벼슬이 주어졌다.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조선 주재 교섭·통상 대표다. 실질적으론 보호국 감국(監國)대신. 원림 박물관의 글귀가 실감난다. ‘조선을 평정한 인물’-. 그의 직위는 도원3품. “청국 군대가 전부 철수했고 고위 직급도 아닌 젊은 관리의 흉계와 행패에 조선 지도층은 무기력했다(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잃어버린 조선 10년의 나라꼴이다. 민씨 수구파의 행태는 사대의 모화(慕華)와 굴종이다. 무능과 부패로 나라는 망가졌다.  
 
21세기 중국 왕이(王毅·왕의) 외교부장의 서울 언행은 무례함이다. 그것은 문재인 외교의 자업자득이다. 문 정권은 일본엔 강경하다. 미국과는 멀어졌다. 중국엔 굽실대며 다가간다. 그럴수록 중국은 한국을 얕잡아 본다. 원미근중(遠美近中)은 악수다.
  
“조선은 부서진 배, 부국강병 소용없다”
 
대원군 유배지, 중국 바오딩에 있는 옛 직례총독서의 북양 대신 이홍장(대원군을 직접 심문)의 밀랍인형. 옆은 박보균 대기자.

대원군 유배지, 중국 바오딩에 있는 옛 직례총독서의 북양 대신 이홍장(대원군을 직접 심문)의 밀랍인형. 옆은 박보균 대기자.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설이 번졌다. 위안스카이의 대처 방식은 폐위 음모다. 그는 고종을 우롱했다. 그의 ‘조선대국론(大局論)’은 기고만장이다.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국이다. 중국을 버린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 말은 시진핑의 역사인식과 어울린다. “시진핑 주석이 말하길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더라(2017년 미·중 정상회담, 트럼프 대통령 공개).” 2021년 문 정권은 시진핑 방한에 매달린다. 그 발언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청국 상인들은 조선 홍삼을 밀수출했다. 조선 해관이 적발했다. 청상들의 대응은 해관 습격이다. 위안스카이는 적반하장식 횡포를 비호했다. 조선의 국가기능은 침체했다. 부국강병의 의지는 꺾였다. 외국 차관은 위안스카이의 허가사안이다. 전신·통신 설치, 선박 운항도 청국 승인을 받았다. 그는 조선의 자주 근대화 기회·수단을 차단·박탈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고종은 대미 외교에 승부를 걸었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공사관을 개설했다(1888년). 위안스카이의 억지는 영약3단(另約三端·세 개의 약속) 요구. 조선 외교관의 위상은 초라해졌다. 그의 겁박과 경멸은 거침없다. “조선은 파주(破舟·부서진 배)다. 부국강병을 논하는 소인배를 임용하면 변란을 초래할 것이다.” 조선 조정의 저항의지는 빈약했다. 민초들이 봉기했다. 1894년 봄 동학혁명이다. 사태는 청일전쟁으로 번졌다(7월). 위안스카이는 조선을 탈출했다. 중국은 한반도 종주권을 잃었다. 그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이양자 교수의 시각은 선명하다. “일본 이토 히로부미 이전에 위안스카이가 망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서울에 오장경 사당이 있다. 연희동 화교중학교 뒤쪽 언덕. 이름은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박스 글 참조〉
 
사당 안에 위안스카이가 쓴 추모 편액이 있다. ‘愴懷袍澤(창회포택, 생사를 같이한 전우를 슬퍼하다)’. 글 쓴 시점은 중화민국 원년(1912년) 10월. 그의 말년 전성기(총통) 때다. 거기에 조선 지배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서울 근교 도봉산의 천년 고찰 망월사-. 그가 쓴 ‘望月寺’ 현판이 걸려 있다. 편액에 ‘光緖 辛未仲秋之月 (광서 신미중추지월)’과 ‘駐韓使者 袁世凱(주한사자 원세개)’라고 적혔다. 시기는 1891년 가을. 휘호는 호기롭다. 그가 총독처럼 으스대던 때다. 무슨 인연인가. “그가 망월사에 왔는지, 글씨만 보냈는지 기록은 없다(신복룡 박사).”
  
이준 열사 묘역의 한심한 풍광
 
서울 수유동에 이준 열사 묘역이 있다. 그는 고종의 밀사다. 임무는 헤이그 세계평화회의(1907년)에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것. 묘역 조형물에 고종의 칙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殉國大節(순국대절)’ 글씨가 붙어 있다. 반대편엔 위안스카이의 만시(輓詩)다. “剖胸懺血示心眞(부흉참혈시심진, 가슴을 갈라 피 뿌려 진실된 마음 보였으니)”으로 시작한다. 입구 안내판은 칙령과 만시를 함께 넣었다. 향토사학자 김준진(59)씨의 지적이다. “위안스카이 추모사가 그럴듯해도, 그가 독립운동에 약간의 도움을 줬다 해도 이렇게 배치하다니··· 그에게 농락당한 고종은 저승에서 후대의 한심한 역사의식을 통탄할 것이다.”
  
나는 원림의 안내판을 떠올렸다. 중국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지시가 적혀 있다. “원림을 보호해 반면교재(反面教材)로 삼으라.” 중국 공산당에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의 배신자다. 그 ‘반면교사’는 한국 외교에도 적용된다. 중화의 본능은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독점이다. 시진핑의 중국몽(夢)은 실천 플랫폼이다. 그것은 동북아 질서를 청일전쟁 이전으로 돌리는 거다. 거기에 위안스카이의 그림자가 넘실댄다.
  
미·중 대치는 동북아의 운명이다. 한국은 주변국(중·일·러시아)과 친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외교의 주춧돌이다. 그게 약화되면 한국은 무시당한다. 역사는 전략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조선 주둔군사령관 오장경, 화교의 창시자로 추앙
사진 1. 오장경

사진 1. 오장경

청나라 장수 오장경(사진1)은 한성(서울)을 장악했다. 병자호란 이후 246년 만의 장면이다. 그는 임오군란 진압군사령관이었다. 한국의 기억은 수치다. 중국은 다르다. 화교의 비조(鼻祖·창시자)다.
 
사진 2.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사진 2.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오장경 부대 안에 40여 명의 군역상인이 있었다. 그해 조선과 청국의 ‘상민수륙무역장정’이 맺어졌다. 청상들이 몰려왔다. 조선에 화교사회가 형성됐다. 오장경 추앙 사당이 건재하다.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사진2)’-. ‘무장’은 그의 시호. 위치는 서울 연희동 한성화교중학교 내 뒤쪽 언덕. 그의 기일(음력 5월)에 사당은 열린다. 제사 주관은 화교협회(주한 대만대표부 후원). 나는 그날 그곳을 찾았다. 코로나19 상황 이전이다. 직사각형 사당은 아담하다. 정전에 편액 세 개가 걸렸다. 중화민국 역대 총통들 글씨다.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 현판(본문 참조)부터다. 가운데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총통의 작품. ‘箕封遺愛(기봉유애, 임무는 다했지만 사랑은 남았다)’- 그 구절은 미묘하면서 언짢다. 중국 리더십의 공통적인 한반도 시선은 종주권 확보다. 그 옆은 리덩후이(李登輝 이등휘) 총통 휘호. 그곳에 함께 간 대만 출신 쩡진더(무역상)의 말이다. “편액은 오장경의 독보적인 역사 위상을 보여준다. 베이징의 중화인민공화국도 관심을 갖고 있다.”
 
사당 건립(1885년)은 보은이다. 고종의 권력 복귀는 오장경 덕분이다. 첫 이름은 ‘정무사(靖武祠)’. 장소는 청군 주둔지. 하도감(下都監) 자리(옛 서울 동대문야구장 뒤편)였다. 대한제국 순종 시절(1908년) 사당 제사가 폐지됐다. 관할권은 중화민국으로 넘어갔다. 이름도 ‘오무장공사’로 바뀌었다. 1970년대 서울의 대규모 정비사업이 있었다. 사당은 지금 장소로 이전·복원됐다(1979년).
위안스카이 둘째 첩, 조선인 김씨의 비애
사진 1. 위안스카이 가계도

사진 1. 위안스카이 가계도

중국 원림(袁林)박물관에 위안스카이의 가계도(사진1)가 붙어 있다.1처(妻)·9첩(妾)의 부인 열 명, 아들 17명과 딸 15명이다. 이 중 둘째·셋째·넷째 첩은 조선인 오(吳)·김(金)·민(閔)씨다. 그와 이들 셋 사이의 자녀는 7남8녀(15명). 전체 자녀(32명) 중 절반쯤 된다(사진2 부인들과 딸). 안내원의 설명이다. “가계도는 위안스카이의 여색에 탐닉한 정력적이고 기괴한 삶을 드러낸다.” 그의 키는 158㎝. 굵은 목에 짧은 다리다. 형형한 눈빛은 상대방을 꿰뚫는 듯하다.
 
사진 2. 위안스카이 부인들과 딸

사진 2. 위안스카이 부인들과 딸

그가 조선에서 원대인(袁大人)으로 뽐낼 때다(1888년, 29세). 그는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의 딸(16세)과 결혼한다. “조선왕비 친척인 김씨는 정실부인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미(17세)고향에서 장가를 들었다. 중국인 정실 우(于)씨 사이에 맏아들이 있었다. 첫째 첩(중국인)은 기생출신으로 남편을 따라와 한성(서울)에서 살았다.”(『民國第一家庭 민국제일가정: 위안스카이 가족』, 저자 周岩 주암) 김씨 이름은 운계(雲溪). 첩이 된 뒤 월선(月仙)으로 개명했다. 한성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위안스카이는 도망치듯 귀국했다. 김씨와 두 몸종도 톈진으로 따라갔다. 위안스카이는 몸종들도 첩으로 삼았다. 나이 순으로 서열이 조정됐다. 몸종 오씨(둘째 첩)가 김씨(셋째 첩)보다 앞섰다. 김씨가 낳은 딸(叔禎 숙정)의 회고다(『我的父親 袁世凱(나의 아버지 위안스카이)』). “어머니는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미모로 평생 우울증을 앓았다. 몸종 여인들도 동렬의 첩이 된 데다 첫째 첩(심씨)의 학대 때문이다. 심씨는 예절을 가르친다고 어머니의 발을 묶고 때렸다.” 위안스카이는 전족(纏足)을 좋아했다. 조선 부인들은 ‘전족 걸음걸이’를 흉내내야 했다. 김씨의 삶은 비애(悲哀)다. 허약한 나라가 낳은 애처로움이다.
 
김씨 소생 자녀들은 총명하고 빼어났다. 차남 커원(克文)은 ‘중화민국 4대 공자’로 꼽혔다. 그는 부친의 황제 즉위에 반대했다. 전시 글 마지막이다. “손자 위안자위(袁家騮·원가류)는 대가족 가문 최고의 성취를 이룬다. 그는 미국에 건너가 물리학 박사가 됐다. 부인 우젠슝(吳健雄·오건웅)은 아시아의 퀴리부인이다.” 위안자위는 커원의 아들, 김씨 부인의 손자다.
 
안양·바오딩·톈진(중국)·오장경 사당(서울)=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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