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영재 曰] 누가 괴물을 키웠나

중앙선데이 2021.02.20 00:28 724호 30면 지면보기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중국에서 중의학(中醫學)을 전공한 K교수는 엘리트 양궁 선수 출신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활을 잡은 그는 당시 겪은 일을 들려줬다.
 

운동선수 학교폭력, 지도자한테 배운 것
‘성적 지상주의’ 대체할 새 모델 나와야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단체로 식사 초대를 받아 점심 먹으러 갔다. 잘 먹고 돌아오자마자 양궁부 전체가 코치한테 곡괭이자루로 20대씩 맞았다. 감독 생일인데 선물을 안 사 갔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맞기만 했다.”
 
더 황당한 건 그가 주장이 돼 전국체전에 출전했을 때였다. 졸업한 선배 한 명이 “네가 선생님 생일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면서 술병으로 때렸다. K교수는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며 왼쪽 눈썹 위 흉터 자국을 보여줬다.
 
K교수는 말했다. “운동선수들의 학교폭력이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그들이 또래를 괴롭히고 후배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도 된다고 누구한테 배웠을까. 운동부 감독을 맡은 학교 선생들이, 또 감독이 고용한 코치가 ‘성적을 내려면 당연히 패야 한다’는 인식에 절어 있었고, 상급생에게 ‘너희도 후배들 두들겨 패서라도 군기를 잡아라’고 무언의 언질을 준 것이다. 그렇게 맞고 자란 후배는 선배가 돼 죄의식도 없이 그짓을 되풀이한다. 폭력의 악순환이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 ‘여자하키 코치의 과거 폭행과 욕설을 고발합니다’는 글이 올라왔다. 2009~12년 경북 S여고 시절 J코치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폭언을 당했다는 청원자는 “제자들을 하키 스틱으로 폭행하고 연습게임 때 못한다고 스틱으로 머리를 내려치신 거 기억하시죠? 부모님들 앞에서도 욕하고 빠따 때리고…”라며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유승진 아시아하키연맹 집행이사는 “경북체육회 감독 시절 이 학교 출신 선수들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다들 주눅 들고 눈치를 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감독이 된 J코치 때문에 하키에 대한 평판이 나빠져서 문경·상주 등 인근 지역에 하키팀을 창단하려는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도자가 선수에게 가하는 폭력은 국가대표팀에서도, 심지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대표 선수촌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여자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는 에이스 선수를 선수촌 라커룸에서 수년간 성폭행했다. 그는 지난달 징역 10년6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남자배구 한국전력의 박철우 선수는 2009년 국가대표 훈련장에서 얼굴에 피멍이 들 정도로 자신을 때린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당시 대표팀 코치)을 공개 비판했다. 이 감독은 폭행 건으로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지만 2년 만에 한국배구연맹 경기운영위원으로 복귀한 뒤 지난해 KB손보 감독을 맡았다.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오랜 시간 스포츠를 담당해 온 기자로서 참담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사건이 터지고 여론이 들끓을 때마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일벌백계, 윤리교육 강화, 신고센터 운영’ 등 동어반복 대책을 내놓는다. 그러다 여론이 잠잠해지면 가해자는 어느새 현장으로 복귀한다.
 
운동에 소질이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는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에 운동부에 들고, 팀 운영에 아무런 권한도 없이 성적 부담에 내몰리는 코치는 익숙한 방식인 폭력에 의존하고, 학교 교사인 감독은 전문 지식이 없어 코치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학교장은 ‘우승하면 좋겠지만, 내 재임 기간 운동부가 사고나 치지 말라’는 입장이고….
 
이게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를 수십 년 떠받쳐온 학교 운동부의 민낯이다. ‘성적만 내면 되고, 성공만 하면 된다’는 빈곤한 철학에 기댄 이 시스템은 ‘폭력의 악순환’과 ‘운동기계+괴물’을 낳았다. 효능과 수명이 다한 학교 운동부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