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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금주법 시대에 달빛 아래서 만들던 위스키

중앙일보 2021.02.16 11: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07)

인도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봤다. 인도 시골 촌구석, 카스트 제도 하층 계급으로 태어난 주인공 발람이 도시에 가서 성공하는 이야기다. 무일푼에 뼛속까지 노예근성을 갖고 있던 발람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부자가 된다. 감독이 위스키 마니아인 듯 이야기의 중요한 장면마다 위스키가 등장한다. 위스키 마니아의 마음은 위스키 마니아가 아는 법. 장면마다 등장하는 위스키가 의미하는 게 뭘까 짚어봤다. (참고로 아래 글에는 영화 ‘화이트 타이거’에 대한 ‘미리니름’이 담겨있습니다.)
 

영화 '화이트 타이거'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발람이 ‘문라이트(Moonlight whiskey) 위스키’를 사는 장면. 열심히 주인을 섬긴 죄밖에 없는 발람에게 ‘음주운전 치사’ 누명의 위기가 닥쳐온다. 사고를 낸 주인이 발람에게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갈 것을 명한 것이다. 실의에 빠진 발람은 술을 사러 간다. 그러나 돈이 없는 발람이 살 수 있는 건 싸구려 밀주, ‘문라이트 위스키’다. ‘문샤인 위스키’라고도 불리는 이 위스키는 달빛 아래 밤에 만들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금주법 시대, 밤에 몰래 위스키를 만들어 팔던 증류업자의 위스키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영화 첫머리에 발람은 인도를 ‘빛의 나라’와 ‘밤의 나라’로 나눈다. 발람이 문라이트 위스키를 사는 건, 밤의 나라에 사는 그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인이 미국으로 떠난 발람의 주인. 외롭고 쓸쓸한 그의 곁에 남은 발람이 유일한 위로다. 발람은 주인에게 신뢰를 얻고, 그와 거의 대등하게 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함께 술을 마시는데, 이때 주인이 갖고 있던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신다. 밀주 위스키에서 싱글몰트 위스키로 바뀌는 건, 발람의 일시적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발람은 ‘글렌리벳(Glenlivet)과 올드풀트니(Old pulteney)’를 섞어 마시며 주인 방에서 인도의 밤을 즐긴다.
 
싱글몰트 위스키 올드 풀트니. [사진 김대영]

싱글몰트 위스키 올드 풀트니. [사진 김대영]

 
주인 밑에서 일하면서 인도 사회의 정경유착을 알게 된 발람. ‘이 세상의 실로 아름다운 것을 목도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길 멈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정치권으로 향할 거액의 뇌물을 갈취하고 주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발람의 살인 도구는 깨진 위스키병.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병으로 주인의 머리를 내려치고 목을 그어 살인한다. 왜 이 장면에 블렌디드 위스키가 등장한 걸까. 블렌디드 위스키는 수십 종류 위스키를 섞어서 만든다. 인도의 썩어버린 부유층을 한 데 섞어 인도 빈민이 처단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건 아닐까. 아니면 돈을 갈취해 부유층에 뒤섞이고 싶은 발람의 소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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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김대영 위스키 인플루언서 필진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 위스키 덕후이자 싱글몰트 위스키 블로거다. 위스키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위스키와 위스키 라벨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위스키에 대한 지식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등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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