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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자신에겐 참 관대한 정권

중앙일보 2021.02.10 00:32 종합 27면 지면보기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일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총리의 지지율을 삽시간에 떨어뜨린 사건은 지난해 12월 14일에 벌어졌다. 이날 저녁 스가 총리는 도쿄 시내의 뉴오타니 호텔에서 기업 경영자 15명과 회식을 했다. 그런 뒤에 또 긴자의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정치인과 배우 등 최소 7명이 참석한 망년회를 했다. 국민들에겐 “원칙적으로 회식은 4인 이하로 하시라”고 권해 놓고 자신은 장소를 바꿔가며 만찬을 더블로 뛰었다. 내로남불에 대한 혐오는 만국 공통인지, 즉각 스가 정권의 지지율 대하락으로 이어졌다. 사실 스가 총리의 만찬은 언론의 특종 보도로 들통난 게 아니었다. 사실상 총리실 스스로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처럼 일정 공개 약속하더니
불리한 약속은 깨고도 사과 없고
월성 원전은 “공약이라 수사안돼”

15일 조간신문들의 ‘총리 동정’난에 전날 총리의 동선이 분(分) 단위로 상세히 보도됐기 때문이다. 가령 니혼게이자이 신문엔 이렇게 소개됐다.  “19시 41분 호텔 뉴오타니 연회장 ‘에도 룸’에서 아오키 히로노리 아오키홀딩스 회장, 이즈모 미쓰루 유글레나 사장 등과 간담회, 20시 50분 스테이크 레스토랑 ‘긴자 히라야마’에서 니카이 자민당 간사장과 하야시 간사장대행,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오사다하루 회장, 배우 스기 료타로, 정치평론가 모리타 미노루, 탤런트 미노 몬타 등과 회식.”
 
조간신문에 보도되는 총리의 동선은 정치부 기자들의 취재와 총리실이 스스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정리된다. 총리가 집무실에서 누구를 만나는지와 퇴근 뒤의 사적인 일정까지 국민 알 권리 차원에서 모두 공개된다. 주말에 누구와 골프를 쳤는지, 어디서 이발을 했는지, 누구와 커피를 마셨는지도 포함된다. 최근 집무실에서 어느 참모와 자주 만나는지를 체크하면 총리의 관심사를 짐작할 수도 있다. 가끔은 이번 만찬 건처럼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총리는 소통과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이를 감수한다.
 
서소문 포럼 2/10

서소문 포럼 2/10

사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전엔 비슷한 약속을 했다. 대선 출마 전인 2017년 1월의 ‘권력적폐 청산 긴급 좌담회’에서 “대통령의 일정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공재”라며 “24시간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파격적 약속은 당시 논란을 낳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 세월호 7시간’과의 화끈한 차별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뒤 이 약속은 빈말이 됐다. 청와대가 현재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대통령의 일정은 초등학생의 수업 시간표만도 못한 수준이다. 그나마 시간차를 두고 공개된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약속 파기에 대해 국민들에게 제대로 사과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지난해 9월 북한에 의한 공무원 피격 사건 때도 야당은 “최초 보고를 받은 뒤 공식 메시지를 내기까지 47시간 동안 대통령의 일정을 분초 단위로 밝히라”고 압박했지만, 청와대는 이렇다할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지키지 못한 공약엔 입을 닫으면서도 자신들이 불리할 때는 늘 공약 이야기를 꺼낸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가 현 정권을 턱밑까지 압박하고 있는 월성 1호기 원전 문제가 대표적이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의원은 “월성 1호기 폐쇄는 19대 대선 공약이었고,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감사 대상도, 수사 대상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대선 승리=월성 1호기 폐쇄 공약 승인’인 만큼 그 자체에 대한 감사나 수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다.
 
지난 5일 대정부 질문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도 같은 주장을 폈다.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문제는 문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취임하고 나서 100대 국정 과제로 선정되었는데 이런 사안이 어떻게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지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고 했다.
 
한번 이기면 5년 임기의 제왕으로 등극하는 게 현재 이 나라의 대통령제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나라의 근본을 뒤집어 흔들 정도의 과격한 공약들이 쏟아진다. 단지 선거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검찰과 감사원 모두 나 몰라라 눈을 감아야 한다는 얘기인가. 선거에서 패한 쪽은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해야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인가. 과거 이명박 정부가 “우리가 이겼는데 왜 한반도 대운하를 못하게 하느냐.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주장했다면 이 정권 사람들은 과연 뭐라고 답을 했을까. 남에겐 한없이 모질고 자신에게는 극단적으로 관대한 태도, 소위 ‘촛불 혁명’의 정신이 이런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서승욱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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