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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인사이트] 미·중 모두 ‘다자주의’라 쓰고 ‘진영 경쟁’이라 읽는다

중앙일보 2021.02.10 00:24

시진핑 연설마다 다자주의 등장하는 이유는

차이나인사이트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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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경쟁이 상시화된 이 시대,  ‘다자주의’란 단어는 강대국들이 세계 패권을 놓고 자웅을 가리는 현상을 일컫는 미사(美辭)의 포장이 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중은 앞으로도 더 자주 다자주의를 강조할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다자주의에는 미국이 포함되지 않고, 미국의 다자주의에는 중국이 없다는 점이다. 각자 우아하게 다자주의라 쓰지만 실제는 서로를 배격하는 치열한 진영 경쟁이 향후 미·중 갈등의 중요한 양상이 될 것이다.  
  

‘신형대국관계’ 약점 발견한 중국
미국엔 동맹이 있지만 중국엔 없어
미·중 경쟁은 친구 빼앗기 싸움

지난 2일 중국 국영방송 CCTV는 조만간 있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외교 정책 연설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바이든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 회복과 다자주의를 강조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면서 “바이든의 다자주의가 미국 중심의 동맹 구조 강화를 의미한다면 이는 곧 미국의 패권 추구를 시사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같은 날 오전 10시(현지 시간) 중국의 외교 사령탑인 양제츠(楊潔篪)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이 미국의 민간단체인 미·중관계전미위원회(NCUSCR)가 주관한 온라인 세미나에서 연설했다.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중국 고위관리가 처음으로 미·중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는“지난 몇 년간 트럼프 행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채택하면서 미·중 관계가 수교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관계가 빠져들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우리는 평화와 발전이 여전히 시대의 지배적인 추세라고 믿는다”며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이 홍콩과 티베트, 신장 등 중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특유의 경고와 유화론를 섞은 것이다.
 
중국이 향후 미·중 관계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힌트도 나왔다. 핵심 단어는 ‘신형(新型)국제관계’다. 새로운 단어는 아니지만 바이든 출범에 즈음해 중국이 내놓은 전략적 화두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중국의 대외관계 전략이었던 ‘신형대국관계’를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신형대국관계에서의 ‘대국’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를 가리킨다. 중국은 오바마 행정부 때 이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미·중 정상이 2013년 캘리포니아 써니랜즈에서 넥타이를 풀고 만나 회담한 자리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광대한 태평양은 미·중 양국을 모두 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충돌하지 말자고 했다. 그때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했던 관료는 훗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당시 이 말의 함의가 무엇인지 몰라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중국 관방언론은 미국이 신형대국관계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중국의 요구는 사실상 ▶중국을 동급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서태평양(즉 태평양의 절반)을 중국 영향권에 두도록 미국이 양보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러면 미·중이 충돌할 일이 없다는 것이 중국 측의 논리였다. 그러면서 ‘윈-윈’이란 표현을 썼다.
 
미국이 그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시진핑 제안의 핵심은 ‘태평양 분할론’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중국판 ‘먼로 독트린’이라 봤다. 중국이 제시한 신형대국관계 개념은 세계 2위 강국인 중국이 세계 1위 강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나머지 세계의 하위 질서는 이에 맞춰 중국에 안정적인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갈 일 것이라는 시각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중 양국 중심의 이원주의적 전략 패러다임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바로 중국과 주변국과의 마찰이다. 일본과는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위기가 고조됐고, 아세안 국가들과는 남중국해 분쟁에 직면했으며,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미얀마는 슬슬 친미 성향을 띠며 미국 쪽으로 기우는 모습이 감지되었다. 이에 시진핑은 이웃 나라와 더 친하게 지내자는 ‘주변국 외교’ 방침을 내놓게 된다. 하지만 선언적 외교와 실제의 공세적 외교 사이의 간극은 좁히지 못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한국에 가한 중국의 치졸한 보복이 한 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미·중 갈등이 더욱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은 중요한 결점을 발견하였다. 항공모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우주 무기까지 갖춘 중국이지만, 미국은 중국에는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많은 동맹국들이다. 중국이 가지지 않은 자산이다. 바이든이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중국을 겨냥해 동맹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하자, 중국은 다른 국가들과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다자주의 전략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미·중 양강 구도의 신형대국관계를 확장하여 신형국제관계로 전략의 방점을 옮기게 된 것이다.
 
신형국제관계는 중국 정부가 2013년부터 사용해 온 용어다. 완전히 새롭게 내놓는 전략이라기보다 중국이 구비한 여러 전략 시나리오 중에서 지금의 시기에서는 이를 더욱 중용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국제관계’란 용어가 있는데 과연 무엇이 ‘신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내부적 논리 정립 과정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전략적 지향점은 명징하다. 중국이 미국과의 경쟁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려면 중국도 미국처럼 국제사회에서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하고 우호적 네트워크를 조밀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국제정치학적 수사로 포장한 것이 바로 다자주의다.
 
시진핑은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다자주의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2020년 11월 열린 상하이협력기구 연설에서도, 같은 해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7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총회 개막식에서도 다자주의를 언급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중국은 시종일관 다자주의를 실천할 것이다”는 별도의 평론을 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여태까지 미국의 전용물이나 마찬가지였던 다자주의 용어를 중국이 더 많이 사용하는 역설적인 시대를 맞고 있다. 과거 중국이 다자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중국 외교의 핵심원칙이 비동맹(不結盟)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지금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다자주의는 미·중 경쟁 상시화 시대에 특별한 전략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미·중 모두 ‘다자주의’라 쓰고 ‘진영 경쟁’이라 읽는다. 이는 상대방의 동맹국을 훔치고 친구를 뺏는 치열한 싸움을 의미한다.
 
다자주의와 중국이 그리는 신중화질서
중국이 다자주의를 부쩍 강조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반중(反中) 진영 결집을 와해하려는 것과 동시에 미·중 갈등 장기화에 대비한 포석이다.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된 미·중 전략경쟁을 반추하며 ▶미·중 갈등은 장기전화하고 ▶근본 원인은 이념과 가치관 대립에 있으며 ▶바이든 행정부 시대에도 근본적 경쟁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고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행정부가 기후변화, 국제 방역, 북핵 문제 등 미·중의 공통 이익 분야에서는 협력하겠다고 하였으나 중국은 그 협력 정도가 깊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이는 중국이 국가 이익과 관련한 사항에 있어서는 ‘사안 연계’(Issue linkage)를 하지 않는 전략 문화와 관련 있다. 미국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중국과의 협력 과정에서 형성된 우호적 분위기를 이용해 다른 사안, 가령 북핵 문제에서도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은 중국에 잘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중국은 미·중 경쟁의 근본을 ‘힘’으로 본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중국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상정하고, 그 원인을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개선에서 찾기보다는 중국의 힘이 아직까지 미국과 동등하거나 미국을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중국이 소프트파워가 아닌 하드파워 힘을 더 길러 미국을 뛰어넘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중국이 서방으로부터 ‘존중’을 받고 중국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하는 첩경은 힘으로 서방을 ‘압도’하는 것이란 논리다. 이는 향후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신(新)중화 질서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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