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권혁재의 사람사진] 한계령 시인 정덕수

한계령 시인 정덕수

중앙일보 2021.02.10 00:15 종합 26면 지면보기
 
 
권혁재의 사람사진/한계령 시인 정덕수

권혁재의 사람사진/한계령 시인 정덕수

 
열여덟 청년 덕수가 한계령 바위에 걸터앉아 남설악을 내려다본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은’ 채였다.
‘발아래 아린 옛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은 그가 자란 품이다.
 
 
발아래 아린 옛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은 그가 나고 자라며 오롯이 품어 왔던 고향이다. 그가 다시 한계령에 들어 〈한계령에서〉를 쓰며 그 스스로 한계령이 되어가는 이유다.

발아래 아린 옛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은 그가 나고 자라며 오롯이 품어 왔던 고향이다. 그가 다시 한계령에 들어 〈한계령에서〉를 쓰며 그 스스로 한계령이 되어가는 이유다.

 
열 한 살 덕수가 집 나간 엄마 찾아 나섰던 길이 그리로 이어져 있다.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히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청계천 봉제공장으로 취직하러 떠난 길이기도 하다.
설악 서북주릉을 넘어온 그가 남설악을 굽어보며 펜을 들었다.
 
한계령 휴계소에서 보이는 산 중턱 바위에 걸터앉은 청년 덕수는 남설악을 굽어보며 열여덟에 〈한계령에서1〉을 썼다.

한계령 휴계소에서 보이는 산 중턱 바위에 걸터앉은 청년 덕수는 남설악을 굽어보며 열여덟에 〈한계령에서1〉을 썼다.

 
‘(전략)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중략)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후략)’
그렇게 한 줄 한 줄 그의 삶을 써 내려 갔다.
청년 덕수의 열여덟 해 삶이 ‘한계령에서 1’이란 시가 되었다.
 
1983년 동대문운동장 근처 산장다방에서 그가 시를 낭송했다
낭송을 들었던 누군가가 그에게 시를 적어달라고 해서 적어줬다.
 
1988년 비를 피해 든 설악의 대피소에서 누군가 노래 ‘한계령’을 불렀다.
노랫말이 귀에 익었다. 처음엔 그의 시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에서 그의 시임을 직감했다.
 
그날의 노래 ‘한계령’은 그의 시 ‘한계령에서 1’에서 발췌한 노랫말이었다.
늘 만만찮던 그의 삶마냥 오랜 세월 지나 2007년에야 공동 작사가로 인정받았다.
 
 
굽어 보이는 남설악 골짜기와 능선 어디 하나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굽어 보이는 남설악 골짜기와 능선 어디 하나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간 그는 시집 『한계령에서』와 『다시, 한계령에서』를 냈다.
한계령 바위에서 삶을 적었던 열여덟 청년은 어느덧 쉰여덟이 되었다.
그는 한계령에서 나서, 그곳을 떠나서도 한계령을 품었고,
다시금 한계령에 품에 돌아왔다.
 
 
가난한 선비’라는 의미에서 한사(寒士)를 호로 쓰는 정덕수 시인은 ‘한사(寒士)의 문화마을’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가난한 선비’라는 의미에서 한사(寒士)를 호로 쓰는 정덕수 시인은 ‘한사(寒士)의 문화마을’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한계령에서’ 연작시를 이으며 그는 언제나처럼 한계령 시인 정덕수로 살고 있다.
마흔 해전 그의 지친 어깨를 떠밀던 ‘서북주릉 휘몰아 온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찍었다.
한계령 고갯마루에 선 시인 정덕수, 그의 얼굴에 한계령이 배어 있었다.
한계령이 그였고, 그가 한계령이었다.  
 
 
그가 〈한계령에서1〉을 쓴 게 1981년이다. 올해 어느덧 40주년이다. 그는 한계령 품에서 40주년 기념으로 400여편의 원고를 책으로 엮는 꿈을 꾸고 있다.

그가 〈한계령에서1〉을 쓴 게 1981년이다. 올해 어느덧 40주년이다. 그는 한계령 품에서 40주년 기념으로 400여편의 원고를 책으로 엮는 꿈을 꾸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기자 정보
권혁재 권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