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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트로트의 양면성, 왜색과 순기능

중앙일보 2021.02.09 00:19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TV를 켠다.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방이 한창이다. 반사적으로 채널을 옮기면 드라마 재방송, 오락 프로그램, 트로트, 중간부터 보기에 영 애매한 영화, 똑같은 뉴스, 또 트로트, 트로트 가수가 경쾌하게 소개하는 광고…. 족히 100여 개는 넘을 것 같은 채널 중에 딱히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늘 그렇듯이, 스포츠 채널에 이르러 리모컨을 내려놓는다. 문득 몇 해 전에 떠나신 아버지 생각에 잠시 마음이 가라앉는다.
 

노래가 동반하는 지난날의 추억
끝없는 갈등과 코로나19에 지쳐
스스로 내린 정서적 처방 아닐까

일평생 뉴스 외에는 거의 TV를 시청하지 않던 분이었지만, 매주 월요일 늦은 밤이면 꼭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가요무대’. 볕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면, 엷은 미소를 머금고 흘러간 노래에 마음을 맡긴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그 행복한 시간을 늘 일주일씩 기다리셔야 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 만에 우리는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TV조선), 보이스 트롯, 트롯 파이터(MBN), 트롯신이 떴다(SBS), 트롯 전국체전(KBS), 그것으로 모자라 트로트가 온갖 광고까지 점령한 ‘트로트의 민족’(MBC)이 되었다.
 
트로트라는 명칭은 아마도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유행한 사교춤 폭스트롯(foxtrot)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뽕-짝, 뽕-짝, 뽕-짝짝, 뽕-짝’이라는 공통된 리듬 패턴을 지니지만, 폭스트롯은 소위 ‘슬로-슬로-퀵-퀵’으로 움직이는 빠른  템포의 춤곡이고 옛 트로트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애절한 노래이므로, 이 둘은 전혀 다른 장르의 음악이다. 오히려 그 리듬적 특징을 소리 나는 대로 쓴 육보(肉譜)식 명칭 ‘뽕-짝’이 그 특징을 잘 드러낸다. 트로트의 뿌리는 잘 알려져 있듯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대중음악, 즉 엔카(演歌)다. 장음계(도레미파솔라시도)의 넷째 음 ‘파’와 일곱째 음 ‘시’를 뺀 ‘도레미솔라’를 요(陽)음계, 단음계(라시도레미파솔라)의 넷째 음 ‘레’와 일곱째 음 ‘솔’을 뺀 ‘라시도미파’를 인(陰)음계라 한다. 요음계는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에 널리 퍼진 평범한 음계지만, 인음계는 왜색(倭色)을 완연히 드러내는 일본만의 특이한 음계다.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알뜰한~ 당신은(시라파미 라파미)’이나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시도 라파미)’,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라라라 시라파미)’를 불러보자. 바로 그 부분이 인음계의 전형이다.
 
‘애국가’의 국가(國歌) 지위를 박탈하고 녹두장군의 동상을 새로이 만들자고 할 만큼 친일행적이나 일제 잔재에 대하여 엄정한 우리 사회가 유독 엔카에 뿌리를 둔 트로트에 대하여 관대하고 심지어 열광하는 역설적 상황은 사실 좀 당황스럽다. 아니, 혼란스럽다. 문화적 소산을 창출한 이의 행적에 따라 그 소산까지 단죄해야 하는지, 그 소산의 뿌리와 결실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글쓰기가 본업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기에 나는 단 한 줄의 글을 써도 늘 맞춤법 검사기를 통해 띄어쓰기와 오·탈자를 검토한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일본어라고는 ‘이치, 니, 산, 시’ 딱 네 개밖에 모르는 내가 쓴 글에 일본식 표현이나 번역체 표현이 늘 적잖이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글쓴이의 행적이 문제라면 도쿄에 이틀 다녀온 것이 전부인 내가 쓴 일본식 표현은 굳이 수정할 이유가 없다. 반면 표현의 문법적 체계와 언어적 정체성을 고려하면 수정해야 마땅하다.
 
음악의 기원이 ‘감정 표출’이라는 학설이 있다.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이 7정(情)을 노래로 승화시킨 것이 음악의 시원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음악의 카타르시스 기능과 연결지어 보면, 노래는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더없이 훌륭한 도구다. 그러니 ‘가요무대’가 아버지께 드린 것은 노래가 아니라 가슴 깊숙히 꾹꾹 욱여넣으며 견딘 젊은 날의 기억을 소환하는 스위치였을 게다. 노랫말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당신의 이야기였기에 거기에서 그 누구도 베풀지 못한 위로와 위안을 얻어 스스로 치유하는 평안의 시간이었을 게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트로트의 뿌리를 논하는 것이 괜한 시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2년이 넘어가도록 좀체 잦아들 줄 모르는 트로트 열풍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치·경제·사회적 갈등과 코로나19,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과 다름없는 암울한 현실에 지친 우리가 우리에게 스스로 내린 정서적 처방이다. 우리 모두에게 더 이상의 위로가 필요 없는, 그래서 복잡하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하는 음악까지 기꺼이 들을 수 있는 새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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