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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성폭력 사건 가해자, 그럴 사람 아니라구요?

중앙일보 2021.02.09 00:15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은의 변호사·작가

이은의 변호사·작가

같은 대본에 등장인물들만 달리 한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는 듯한 일들이 요즘 반복되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까지. 유력 정치인들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들과 이를 둘러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그렇다.
 

가해자 두둔, 피해자엔 2차 가해
수사 단축하고 배상금액 올려야

이런 사건들에 흔하게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가해자를 두둔하며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며 감싸는 반응이다. 이와 함께 피해자를 향해 “걔가 평소에 좀…”이라는 뒷담화가 따라온다. 가해자가 성폭력을 저질렀을 이유가 없다는 믿음, 설령 문제 있는 언동을 좀 했더라도 피해자가 유발했거나 침소봉대했을 수 있다는 의심이다.
 
오래된 이런 서사는 사람들이 처음 사건을 접하고 받은 충격과 경악을, 시간이 흐르면서 “확실해?” 라는 의심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런 서사는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합리적 의심’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둔갑했다.
 
그렇지만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나 ‘그런 짓을 당할만한 사람’이란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누구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해줬다. 우월적 지위에서 가해지는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평온했던 삶을 흔든다. 더 큰 난관은 애써 용기를 내 문제를 제기하면서 펼쳐진다. 온갖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는 가해자와 그럴 수도 있는 피해자’ 프레임으로 피해자를 옭아맨다.
 
2차 가해는 다양하게 벌어진다. 일례로 박원순 전 시장에 대한 고소사건은 고소장을 경찰에 접수하기도 전에 피의사실이 유출했다. 제대로 된 가해자 수사를 통해 사건을 소명 받을 피해자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됐다. 심지어 이 일은 여성 인권을 대변해온 정치인과 여성단체 대표, 이런 사건을 관리·감독 해야 할 서울시 공무원에 의해 저질러졌다.
 
어느 검사는 박 전 시장과 팔짱을 낀 사진을 SNS에 올리고 자신이 박 전 시장을 추행한 것이라며 피해자를 조롱했다. 조문을 온 여당 대표는 피해자라는 호칭에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박 전 시장의 지지자들은 온라인에서 피해자의 신상을 까발리며 피해자를 심지어 “살인자”로 몰아갔다. 피해자와 함께 근무했던 이는 피해자가 쓴 편지들을 무단으로 SNS에 올렸고, 한 교수는 이를 공개하고 실명까지 노출했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명예훼손·모욕 및 정보통신망법 위반이 될 수 있고, 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 음란 또는 사생활 침해 등의 범죄가 될 수 있다. 범죄 성립이 안 되더라도 손해배상 책임이 따르는 민사상 불법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현행법상 2차 가해에 대해 처벌을 요구하거나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고소하거나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하므로 피해자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언론 보도로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은 자발적인 조력자들이 나서고 지켜보는 눈도 많으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그렇지 못하다. 많은 피해자는 2차 가해에 대한 조치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따라서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권리구제가 이뤄지려면 수사기관은 수사 절차를 대폭 단축하고 인지 수사의 폭을 넓혀야 한다. 법원은 2차 가해에 대한 처벌과 배상을 실제 피해 수준에 맞춰 상향해야 한다. 특히 형사재판에서 피해배상 금액을 함께 판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받은 고통은 피해자 개인만의 고통처럼 보이지만 함께 몸담은 한국사회 전체가 직면한 위험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우리 공동체가 함께 직시해야 피해자의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고, 공동체의 위험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은의 변호사·작가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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