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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미·소 냉전 끝낸 ‘전설의 국무장관’

중앙일보 2021.02.09 00:03 종합 16면 지면보기
조지 슐츠(앞줄 오른쪽 둘째) 미국 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왼쪽 둘째) 소련 외무장관이 1985년 11월 21일 미·소정상회담 이후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뒤에서 서명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지 슐츠(앞줄 오른쪽 둘째) 미국 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왼쪽 둘째) 소련 외무장관이 1985년 11월 21일 미·소정상회담 이후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뒤에서 서명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외교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지 슐츠(사진)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6일(현지시간)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백수(百壽)를 넘겨서까지 ‘특별 연구원’이라는 직함으로 몸담았던 ‘싱크탱크’ 후버연구소는 이날 “슐츠 전 장관이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 캠퍼스 내 자택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슐츠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로도 재직했다. ‘외교 거인’으로서의 그가 세운 공로 덕이다.
 

조지 슐츠
세계 바꾼 ‘외교 거인’ 101세에 별세
레이건 정부 때 소련과 비밀채널
1987년 핵미사일 2692기 폐기 합의

그는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때문에 그의 업적은 외교뿐 아니라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노동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닉슨 행정부에서 백악관 예산국장, 재무장관 등 경제 요직을 두루 맡았다.
 
조지 슐츠

조지 슐츠

영국 ‘가디언’은 그가 재무장관 시절 “국세청을 이용해 정적들을 축출하라”는 닉슨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닉슨은 슐츠를 “겁쟁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외교를 책임지는 국무장관으로서의 역할은 80년대 초에 빛을 발했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82년 국무부 수장으로 취임한 그는 전임자인 알렉산더 헤이그와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대소련 강경책 일변도였던 헤이그와 달리 슐츠는 “소련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중한 슐츠가 덩샤오핑과 회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방중한 슐츠가 덩샤오핑과 회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부를 정도로 반(反) 소련 분위기가 강했지만, 슐츠는 외교의 힘을 믿었다. 그는 소련과 은밀히 외교 채널을 뚫었고 85년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비췄다. 소련의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즉 개혁과 개방을 기치로 내걸었고 미국과의 데탕트, 즉 긴장 완화를 추구했다. 슐츠의 노력이 결실을 볼 때가 온 셈이었다.
 
물론 순탄하진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후에도 워싱턴DC 내에 소련이 바뀌리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였다. 슐츠는 “크렘린(소련 지도부)이 바뀔 것”이라 믿었지만, 당시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 등 회의론자들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한 건 와인버거의 냉소가 아니라 슐츠의 노력이었다. 슐츠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과 회동했고, 역사적인 미·소 정상회담의 판을 깔았다.
 
82년 7월 국무장관 지명자 시절의 슐츠(오른쪽)가 조 바이든(왼쪽) 현 대통령 등 당시 상원 외교관계위 위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82년 7월 국무장관 지명자 시절의 슐츠(오른쪽)가 조 바이든(왼쪽) 현 대통령 등 당시 상원 외교관계위 위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결국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그해 11월을 시작으로 87년까지 세 차례 회담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 세 번의 회담을 위해 슐츠와 셰바르드나제는 30회나 만났다.
 
슐츠의 노력은 미·소 냉전 종식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후버연구소장인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애도를 표하면서 “그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든 사람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86년 방한한 슐츠가 이민우 신민당 총재, 노태우 민정당 대표, 이만섭 국민당 총재(왼쪽부터)를 맞고 있다. [중앙포토]

86년 방한한 슐츠가 이민우 신민당 총재, 노태우 민정당 대표, 이만섭 국민당 총재(왼쪽부터)를 맞고 있다. [중앙포토]

6년 반 동안 장수 국무장관으로 재임했던 그의 또 다른 업적은 87년 체결된 미·소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이다. 경쟁적으로 핵전력을 과시하며 단거리(500~1000㎞) 및 중거리(1000~5500㎞) 미사일 생산과 배치에 열을 올렸던 양국은 INF를 통해 단·중거리 탄도 및 순항 미사일의 생산, 발사실험, 배치를 전면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군비 경쟁 종식을 통해 냉전 종막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조약에 따라 양국은 91년 6월까지 미사일 2692기를 폐기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INF 탈퇴를 선언하자 슐츠는 뉴욕타임스(NYT)에 “엄청난 (역사적) 후퇴”라고 비판하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86년의 이란-콘트라 반군 사건 때는 위기를 맞기도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바논이 근거지인 이슬람 과격단체 헤즈볼라가 미국인 인질을 납치하자 이들의 석방을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시도했다. 당시 이라크와 전쟁 중이던 이란에 미국 무기를 팔고, 그 대금으로 레바논의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키는 동시에 중남미 니카라과의 공산 정권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까지 지원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테러 집단과는 흥정하지 않는다는 외교 원칙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반군 지원을 금지한 볼런드 수정헌법까지 위반하는, 위험천만한 전략이었다. 미국의 적대국인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도 문제였다.
 
NYT에 따르면 슐츠는 당시 이 전략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고,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했다고 한다. 결국 이 전략은 여론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슐츠 역시 세 차례나 “사임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백악관에 격렬히 항의했다고 한다.
 
슐츠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1992년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제2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이던 1987년 슐츠에게 “전두환 정권이 양심수를 석방하도록 노력해달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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