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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ㆍ소 핵 감축 이끈 외교 거인 101세로 잠들다

중앙일보 2021.02.08 18:05
냉전시대를 끝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101세 나이로 별세했다. [AFP=연합뉴스]

냉전시대를 끝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101세 나이로 별세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6일(현지시간) 별세한 조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은 외교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다. 뼛속까지 외교관인 그는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백수(百壽)를 넘겨서까지 '특별 연구원'이라는 직함으로 몸담았던 싱크탱크 후버연구소는 이날 "슐츠 전 장관이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 캠퍼스 내 자택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슐츠 전 장관은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로도 재직했다. '외교 거인'으로서의 그가 세운 공로 덕이다. 

조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 별세

 
그의 업적은 외교뿐 아니라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배경 덕이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노동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닉슨 정권에서 백악관 예산국장, 재무장관 등 경제 요직을 두루 맡았다. 
 
영국 가디언은 그가 재무장관 시절 정적들을 축출하기 위해 국세청을 이용하라는 닉슨 전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닉슨 대통령은 슐츠를 "겁쟁이"라고 비난했지만 슐츠는 흔들리지 않았다. 닉슨이 슐츠를 비난하는 육성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닉슨은 탄핵에 직면하게 되고, 직접 사임을 택했다.  
 
1992년 조지 슐츠 전 장관이 서울평화상을 받는 모습. 중앙포토

1992년 조지 슐츠 전 장관이 서울평화상을 받는 모습. 중앙포토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92년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제2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은 87년 상원의원이었던 시절, 슐츠 당시 장관에게 “한국 전두환 정권이 양심수를 석방시키도록 노력해달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 외교를 책임지는 국무장관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1980년대 초에 빛을 발했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였다. 82년 국무부 수장으로 취임한 그는 전임자인 알렉산더 헤이그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대소련 강경책 일변도였던 헤이그와는 달리 슐츠는 "소련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두고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까지 불렀던 때였다. 살벌한 반(反) 소련 분위기 속에서도 슐츠는 외교의 힘을 믿었다. 소련과 은밀한 외교 채널을 뚫었고, 동시에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의 동료들과 각을 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설득하는 리더십을 보였다.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취임 후 3년이 지난 85년에서야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비췄다. 당시 소련 최고지도자였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사망하면서다.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즉 개혁과 개방을 기치로 들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긴장 일변도로 치닫는 대신 데탕트, 즉 긴장 완화를 통해 소련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슐츠의 수년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가 온 셈이었다. 
 
 85년 소련과 무기 감축 협상을 한 뒤 백악관에 선 (왼쪽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조지 부시 부통령의 모습. [AP=연합뉴스]

85년 소련과 무기 감축 협상을 한 뒤 백악관에 선 (왼쪽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조지 부시 부통령의 모습. [AP=연합뉴스]

 
순탄하진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후에도 소련이 바뀌리란 생각은 워싱턴DC에선 소수에 가까웠다. 당시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가 회의론자의 대표주자였다. 슐츠 장관은 "크렘린(소련 지도부)이 바뀔 것"이라 믿었지만 와인버거는 비웃었다. 역사가 기록한 건 와인버거의 냉소가 아닌 슐츠의 노력이다. 슐츠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과 회동했고, 역사적인 미·소 정상회담의 판을 깔았다. 
 
결국 레이건·고르바초프 양국 정상은 그해 11월을 시작으로 87년까지 세 차례 회담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슐츠와 셰바르드나제가 3번의 정상회담을 위해 만난 횟수는 30회에 달한다. 
 
조지 슐츠(오른쪽) 전 미 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의 모습. 중앙포토

조지 슐츠(오른쪽) 전 미 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의 모습. 중앙포토

 
슐츠의 노력은 미·소 냉전 종식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후버연구소장인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그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든 사람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그는 6년 반 동안 장수 국무장관으로 재임했다.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87년 체결된 미·소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이 꼽힌다. 그 전까지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핵전력을 과시하며 단거리(500~1000㎞) 및 중거리(1000~5500㎞)의 미사일 생산과 배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양국은 INF를 통해 단·중거리 탄도 및 순항 미사일의 생산은 물론 발사실험과 배치를 전면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군비 경쟁을 종식하면서 냉전의 막을 내리도록 유인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조약에 따라 양국은 91년 6월까지 미사일 2692기를 폐기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역시 INF를 인용하며 추가 미사일 폐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INF 탈퇴를 선언하자 슐츠 전 장관은 NYT에 “INF 파기는 엄청난 (역사적) 후퇴”라고 비판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맨 오른쪽)이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불거지자 조지 슐츠 국무장관(왼쪽 두 번째),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에드 미스 법무장관, 돈 리건 비서실장과 만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맨 오른쪽)이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불거지자 조지 슐츠 국무장관(왼쪽 두 번째),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에드 미스 법무장관, 돈 리건 비서실장과 만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슐츠 전 장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86년에 불거진 이란-콘트라 반군 사건이 대표적이다. 문제의 발단은 레바논이 근거지인 이슬람 과격단체 헤즈볼라의 미국인 인질 납치였다. 이들의 석방을 위해 레이건 행정부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시도한다. 중동 지역의 적을 활용해 중남미의 공산 정권까지 해결하려고 했던 계획이다. 당시 이라크와 전쟁 중이었던 이란에 미국의 무기를 팔고, 그 대금으로 레바논의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키면서 동시에 중남미 니카라과의 공산 정권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슐츠 당시 장관은 NYT에 따르면 이 전략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고,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했다고 한다. 이는 슐츠 장관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전략이었다. 이란은 미국의 적대국이었을뿐더러 인질 석방을 위해서라고 해도, 헤즈볼라와 같은 테러 집단과는 흥정을 하지 않는다는 외교 원칙이 깨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반군 지원을 금지한 볼런드 수정헌법까지 위반하는 일이었다. 결국 이 전략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슐츠 역시 백악관에 격렬히 항의하며 세 차례나 사임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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