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미얀마 만달레이의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고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얀마 군, 독립 운동 시절 결성
독립운동가들 일본군 훈련받고
영국 대항하다 건국 과정 주도
아웅산, 초대총리, 군부독재자까지
모두 버마독립군 결성 ‘30인 동지’
독립과 정부수립, 쿠데타에 연루
군, 소수민족 무장투쟁 속 세력 키워
135개 다민족 갈등과 분쟁 끝없어
민주화 탄압 8888사건, 로힝야 압박
모두 군부가 앞장선 반인륜 범죄
수지 집권 뒤 척결 대신 공생해와
국민 민주화 의지, 현실 모두 봐야
외세, 이익만 따져 사태 도움 한계
2015년 이어 2020년 총선서도 NLD 압승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7일 군사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다. 지난 1일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는 전화와 인터넷을 대부분 끊었지만, 시민들은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항의 시위를 계속 열고 있다. [AFP=연합뉴스]](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08/9e7a6c1e-9b6d-44b3-b0fc-bee61c9bcf45.jpg)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7일 군사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다. 지난 1일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는 전화와 인터넷을 대부분 끊었지만, 시민들은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항의 시위를 계속 열고 있다. [AFP=연합뉴스]
군부 앞에만 서면 약해지는 수지
왜 이렇게 수지 고문마저도 군부 앞에만 서면 꼼짝을 못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미얀마와 미얀마군 사이의 뿌리 깊은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미얀마에서 군은 행정부의 산하 조직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지난 7일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의 거리에서 시위대가 군부 쿠데타 항의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붉은 색 바탕에 하얀별과 공작새가 그려진 국민민주동맹(NLD)의 깃발을 들고 저항의 뜻으로 세 손가락을 펼쳐 보이고 있다. 세 손가락 경례는 영화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에 등장한 것으로 홍콩과 태국 네티즌 사이에서 선거·민주주의·자유를 의미해왔다. EPA=연합뉴스
미얀마군, 항영 독립 투쟁과 건국 주역으로
이에 따라 미얀마와 미얀마군을 민주주의와 독재, 민정과 군정, 친서방과 친중 등의 단순한 잣대로 재단하기는 힘들다. 복잡하고 해결하기 쉽지 않은 미안마의 내부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미얀마는 1824년 제1차 미얀마-영국 전쟁 패배로 국토 일부를 영국에 빼앗긴 뒤로 전쟁에 두 차례 더 패했다. 결국 1885년 콘바웅 왕조(1752~1885년)가 무너지고 전국이 영국 식민지가 돼 1948년 독립까지 123년간 지배를 받았다.
충성 대상이던 왕조가 사라지고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얀마는 종족·지역·종교별로 조각이 났다.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분열과 갈등의 시작이었다. 북부의 일부 종족은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저항했으며 영국이 마을과 농토를 철저히 파괴하면서 보급을 끊으면서 게릴라 항전이 끝났다.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에서 지난 7일 군사 쿠데타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붉은 바탕에 하얀 별과 금색 공작새가 그려진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국민민주동맹(NLD)의 깃발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미얀마를 ‘식민지의 식민지’로 경영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지 신분사회로 만들었다. 우선,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인이 최고 지배계급을 형성했다. 혼혈인과 다른 식민지에서 데려온 인도·중국인,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미얀마인에게 행정사무·하급군인·경제를 맡겨 중간 계층을 형성하도록 했다. 불교도 미얀마 농민은 최하위층이 됐다.
농민들은 영국 기업과 영국인 지배계층을 위해 상업작물 재배에 내몰렸다. 영국은 1869년 11월 수에즈 운하가 개통돼 남아시아와 유럽과의 거리가 단축되자 미얀마를 유럽에 수출할 환금작물인 쌀의 생산기지로 삼았다. 미얀마가 한때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으로 기록된 이유다. 쌀이 먹고 남아 수출한 게 아니라 수출을 위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단일 작물로 재배해야 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저항은 불교 승려가 주도했다. 시위를 주도했으며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 숨진 경우도 있었다. 당시 영국에 혹독하게 당한 경험 때문에 미얀마는 독립 이후 영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영국 지우기 운동에 나섰다. 이는 반외세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냉전 시절 미국도 소련도 따르지 않고 중립을 지킨 이유로 작용했을 수 있다.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 사진=퍼블릭 도메인
독립운동 청년 ‘30인의 동지’ 일본군이 군사훈련
이들은 1930년에 결성된 미얀마 반영조직 ‘우리 버마 협회(도바마 아시아요네· 주인이라는 의미의 타킨스라고도 부름)’에서 활동했다. 타킨스에서 활동하던 청년 회원 중 30명은 접근한 일본인을 통해 1941년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섬으로 갔다. 이들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이곳에서 일본군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버마 독립군(BIA)’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들을 선발해 훈련을 시킨 주체는 일본군이 미얀마의 영국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운영한 특무기관(공작기관)인 미나미키칸(南機關)의 책임자인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1897~1967년) 장군이었다. 일본군이 공작 차원에서 훈련시킨 이 청년들은 ’30인의 동지‘로 불리며 미얀마 독립 전후 핵심 세력이 됐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아웅산이었다. 이들은 1942년 일본군이 미얀마를 침공하면서 함께 귀국했지만, 일본군이 점령군으로서 호되게 굴자 일본군과도 교전을 벌였다.

아웅산과 30인의 동지. 사진=퍼블릭 도메인
‘30인의 동지’, 버마독립군 결성하고 건국도 주도
19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으로 독립한 미얀마는 아웅산의 동료인 우 누가 총리를 맡아 이끌었으며 AFPFL은 집권당이 됐다. 실권 없이 상징적 자리였던 대통령은 소수민족인 샨족의 세습지도자인 사오 슈웨 타익(1895~1962년, 대통령 1948~1962년, 상원의장 1952~1960년)가 맡았다.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그 뒤 우 누가 장기 집권하면서 집권당인 AFPFL 내에서 분열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AFPFL은 독립 직전인 1947년과 독립 뒤인 1951~1952년, 1956년 선거에서 승리해 안정적으로 정권을 운영했다. 하지만 1958년 1월 내부 분란으로 AFPFL은 우 누의 ‘청렴AFPFL’과 반대파의 ‘안정AFPFL’로 분열했다. 하원에서 숫자는 반대파가 더 많았지만 우 누는 야당의 지원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군이 개입했다. 군부는 1958년 ‘선거관리 내각’을 구성해 1960년 선거까지 18개월간 국정을 맡기로 했으며 네 윈이 총리를 맡았다.

일본에 머물 당시의 아웅산(오른쪽). 사진=펴블릭 도메인
같은 ‘30인의 동지’ 출신 우 누 정권을 네 윈이 쿠데타로 전복
민간 정부가 다시 강력한 힘을 회복하자 네 윈이 이끄는 군부는 1962년 쿠데타로 집권했다. 네 윈도 ‘30인의 동지’의 한 명으로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었다. 독립운동가들끼리 권력을 둘러싸고 싸운 셈이다.
군부는 쿠데타 당시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며 범죄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버마 사회의 법과 질서 회복을 위해 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사 정권은 1964년 일당 독재를 시작하면서 집권당이던 연방당과 야당인 국민통합전선도 모두 사라졌다.
군부는 국호인 ‘버마 연방’을 ‘버마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꿔 1988년까지 유지했다. 연방이란 용어가 소수민족에 지나치게 양보한 용어로 인식해 싫어했다는 설명이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 진압은 미얀마군의 존재 이유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군은 과거 식민지와 독립 운동 시절은 물론 건국 뒤에도 계속 상당한 힘과 국민 지지를 얻어왔다. 가장 큰 이유가 독립 직후부터 벌어진 소수민족의 무장 분리운동과 내전이다.

미얀마 경찰이 7일 최대 도시 양곤의 양곤 대학 앞에서 시위 진압을 준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소수민족 분쟁으로 군부 입김 강해져
현재 5300만 인구의 미얀마는 버마인(68%)·샨인(9%)·카렌인(7%)·라카인인(4%)·몬인(2%)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35개 민족·종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버마인과 카렌인은 중국티베트계 언어를 사용하고, 샨인은 타이계 언어를 몬인은 몬-크메르 계열의 언어를 사용한다. 소수 민족·종족 가운데 특히 국경지대에 사는 집단은 별도 독립을 주장해 독립 직후부터 내부에서 갈등과 분규, 그리고 무장 투쟁이 벌어졌다.

태국 방콕의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항의하는 사위대가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과 국민민주동맹(NLD)의 로고가 새겨진 사진을 들고 세 손가락을 펼쳐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종교·종족 분쟁으로 독립 이후 줄곧 내전상태
방글라데시·인도와 접경한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와 친 주에서는 친인들이 역시 중앙 정부에 대항한다. 1948년 독립 이후 미얀마에서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조사 주체에 따라 13만~25만으로 추정한다. 주민 60만~100만 명이 집을 잃고 떠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살과 인권유린, 소년병, 인신매매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양산한 미얀마군과 정부의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은 별도다.

미얀마 지폐에 그려진 아웅산 장군 초상. 사진=퍼블릭 도메인.
소수민족 진압하고 치안 유지하느라 군부 비대화
이런 군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네 윈은 1962~1974년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1974~1981년 대통령을 맡았으며 1962~1988년 일당독재 정당인 버마 사회주의계획당 대표를 지내며 미얀마를 철권 통치했다.

미얀마 독재자 네 윈의 4번째 결혼식. 사진=미얀마 역사 자료 보관소
불교와 공산주의 융합한 네 윈의 불교 사회주의

196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통치한 네 윈. 사진=퍼블릭 도메인

방글라데시의 쿠루팔롱 난민촌에서 로힝야 난민들이 흙포대러 길을 만들고 있다. 우상조 기자
군부가 무슬림 로힝야인 탄압 원조
군사정권은 1978년 ‘외국인’이라며 로힝야인 20만 명을 강제로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로 밀어냈다. 1991~92년엔 25만 이상을 다시 쫓아냈다. 아웅산 수치가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2015년 다시 탄압과 추방을 재개해 인도주의 재앙이 벌어졌다.
![방글라데시 동남부 차토그람 신체재활센터(CRP)에서 만난 로힝야 난민 무함마드 알롬이 장애를 안게 된 사연을 말하고 있다. [비디오 화면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08/c613e78c-06a8-4b82-959e-3f5afa33e446.jpg)
방글라데시 동남부 차토그람 신체재활센터(CRP)에서 만난 로힝야 난민 무함마드 알롬이 장애를 안게 된 사연을 말하고 있다. [비디오 화면 캡처]

방글라데시 쿠루팔롱 난민촌에서 한 로힝야 난민이 국제인도주의 기구인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식량 배급을 받고 임시 숙소로 가고 있다. 사진=ICRC
8888운동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 점화
이런 상황에서 당시 어머니의 위독으로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국부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지는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자지 잡았다. 수지는 부친 암살 뒤 어머니와 함께 해외에서 거주하며 영국 옥스퍼드대를 마치고 미얀마인 우 탄트(1909~74년, 재임 1961~1971년)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던 유엔에서 일했다. 1972년 영국인 역사 교수와 결혼해 남편이 근무하는 옥스퍼드에 거주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수치는 1989년부터 군사 정권에 가택 연금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군정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이끌어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노벨상을 받으러 출국할 경우 군사 정권이 귀국을 막을까 봐 국내에 머물렀으며, 남편과 두 아들이 대리 수상을 했다. 1995년 가택 연금은 해제됐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며 민주화 운동을 계속 펼쳤다. 2010년 말 미얀마에서 20년 만에 총선이 실시되면서 비로소 석방됐으며 2012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해 정치에 진출했다. 같은 해 노르웨이로 가서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비로소 수락 연설을 했다.

2019년 12월 10일 '로힝야 학살'과 관련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 법정에 변호인단과 함께 증인으로 출석한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 AFP=연합뉴스
수지,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와 공생 관계
주목할 점은 쿠데타 직전 수지의 권력이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NDL은 지난해 11월 8일 치른 총선에서 83%를 득표해 하원 의석 440석 가운데 315석, 상원에선 224석 중 16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군부와의 권력 균형을 깨고 민간 정부가 이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자 군은 선거 직후부터 유권자 수 3700만 명을 기재한 유권자 명부가 실제와 860만 명이 차이가 난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다 급기야 쿠데타를 일으켰다.

7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미얀마 쿠데타 규탄 시위에서 한 참석자가 쿠데타 주역인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의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은 흘라잉의 얼궁에 X자를 그리고 그 아래에 '부끄러운 줄 알아라, 독자자야. 우리는 너를 용서하지 앟겠다'라고 적혀있다. EP=연합뉴스
미얀마군 민주화 이후에도 기득권 누려

미얀마 민주화에서 쿠데타까지. 그래픽=신재민 기자

지난 2017년 11월 27일 미얀마 최대도시 앙곤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영나온 어린이들과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종교인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제외하고는 자국 이익에 맞춰 미얀마를 바꾸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미국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얀마 확산으로 세계의 민주주의 보루라는 국제적 이미지를 확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지 고문처럼 오바마 대통령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중국은 미얀마의 지정학적 이점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지난 1월 1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얀마 네피도 국제공항에서 환영식을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미얀마는 석유와 가스가 풍부하다. 한국의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미얀마 북서부 해상 A-3 광구에서 발굴한 '마하 유망구조' 가스층 산출시험을 하는 장면. 사진 포스코인터내셔널
한국은 미얀마인 3만여 명이 일하고 공부하는 나라다. 호르무즈 해협의 이란 항구인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압된 한국 선박의 선원 20명 중 11명이 미얀마인이다. 미얀마도 한국과 멀지 않다. 코로나 이전 미얀마는 한국 불교 신자들의 인기 순례지였고, 한국은 미얀마의 최대 관광객 송출 국가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