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2세에 오스카 연기상…'사운드오브뮤직' 대령 별세에 애도물결

중앙일보 2021.02.07 12:03
5일(미국 현지 시간) 작고한 캐나다 출신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 사진은 2012년 그가 84세의 나이에 영화 '비기너스'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연기상(남우조연상)을 받으며, 아카데미 역대 최고령 연기상 기록을 세운 순간이다. [AFP=연합뉴스]

5일(미국 현지 시간) 작고한 캐나다 출신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 사진은 2012년 그가 84세의 나이에 영화 '비기너스'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연기상(남우조연상)을 받으며, 아카데미 역대 최고령 연기상 기록을 세운 순간이다. [AFP=연합뉴스]

뮤지컬 영화의 고전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5일(현지 시간)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1세. 51년을 함께한 아내 일레인 테일러가 임종을 지켰다. 뉴욕타임스는 유족을 인용해 과거 고인이 넘어져 머리를 부딪친 것이 사망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상대 배우 줄리 앤드루스는 성명에서 “오늘 세상은 유능한 배우를 잃었고 나는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 91세 별세
82세에 최고령 오스카 연기상
오스카·토니·에미상 모두 받아

 

캐나다 명문가…증조부는 전 총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 [사진 피터팬픽쳐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 [사진 피터팬픽쳐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고인은 명문가인 캐나다 전 총리 존 애벗의 증손자로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 후 퀘벡에서 증조부의 궁전 영지를 오가며 자랐다. 어려서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공부했지만, 몬트리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주연 영화 ‘헨리 5세’를 보고 연기에 눈을 떴다. 10대 때 학생 연극에서 무대연출가에 발탁돼 캐나다에서 배우 생활을 하던 중 50년대 브로드웨이 데뷔했다. 셰익스피어극 ‘햄릿’ ‘리어왕’ ‘헨리 5세’ 등 영국국립극장‧로열 셰익스피어컴퍼니의 정통극에도 단골 출연했다. 토니상 후보에 7차례 올라 74년 뮤지컬 ‘시라노’, 97년 명배우 존 배리모어(드류 배리모어 할아버지)의 자전적 연극 ‘배리모어’로 토니상을 2번 수상했다.  
스크린에선 시드니 루멧 감독이 뉴욕의 극장 무대 뒤를 그린 로맨스물 ‘스테이지 스트럭’(1958)의 극작가 역으로 데뷔해, 반세기 동안 100편 넘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다.  
 

서른여섯에 '사운드 오브 뮤직' 스타덤  

출세작은 단연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고인이 서른여섯이던 1965년 미국 개봉해 이듬해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음악상 등 5관왕을 차지한 이 뮤지컬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피해 조국 오스트리아를 탈출했던 조지 폰 트랩 가족 합창단의 실화가 토대다. 고인은 아내를 잃고 7남매를 홀로 키우는 완고한 아버지 트랩 대령을 연기했다. 수녀원에서 온 발랄한 가정교사 마리아(줄리 앤드루스)로 인해 마음을 치유한 트랩 대령은 온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 망명길에 나선다. 고인이 극 중 기타를 치며 노래한 ‘에델바이스’ 등 170분 넘는 상영시간을 아름다운 노래로 채워 한국에서도 69년 서울 대한극장에서 첫 개봉 당시 “3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함께 볼 명화”로 입소문 나며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과 더불어 만원사례를 이뤘다.  
'사운드 오브 뮤직' 스타 줄리 앤드루스와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2015년 LA에서 열린 이 영화 개봉 50주년 기념 상영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AP=연합뉴스]

'사운드 오브 뮤직' 스타 줄리 앤드루스와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2015년 LA에서 열린 이 영화 개봉 50주년 기념 상영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AP=연합뉴스]

이전까지 할리우드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고인은 이 영화에서 사랑으로 180도 바뀌는 우수에 찬 캐릭터로 스타덤에 올랐다. 정작 자신은 딱딱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기하느라 힘들었으며 이 작품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판했다. 1982년 미국 ‘피플 매거진’ 인터뷰에선 “본 트랩 같은 형편없는 역할을 위해 나는 그 배역의 텅 빈 몸뚱이를 채워 넣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속임수를 동원해야 했다. 그 망할 영화는 나를 귀찮게 따라다닌다”고 했다. 명성에 대해서도 신랄한 태도였다. 같은 해 영국 일간 ‘더 타임스’에는 “하느님 감사하게도 나는 슈퍼스타가 아니다. 세상에, 슈퍼스타가 된다는 건 극도로 피곤하고 제한받는 일일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인은 훗날 여러 공식 석상에서 젊은 시절 자신이 자만했다며 ‘사운드 오브 뮤직’이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를 이해하고 훌륭한 가족 뮤지컬이라고 인정했다.  
 

귀족적 카리스마, 90세까지 연기 왕성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연극 무대로 먼저 경력을 시작했다. 사진은 1959년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공연 'J.B.'에서 사탄을 연기한 플러머의 모습이다. [AP=연합뉴스]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연극 무대로 먼저 경력을 시작했다. 사진은 1959년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공연 'J.B.'에서 사탄을 연기한 플러머의 모습이다. [AP=연합뉴스]

고인은 귀족적인 외모와 중저음의 풍부한 목소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숀 코너리, 마이클 케인과 주연한 모험영화 ‘왕이 되려던 사나이’, 셜록 홈스를 연기한 ‘살인 지령’ 등 카리스마 강한 역할을 도맡았다. 노인 악당 목소리 연기에 도전한 픽사 애니메이션 ‘업’부터 판타지 액션 ‘스타 트렉 6-미지의 세계’, SF 스릴러 ‘12 몽키스’, 스릴러 ‘인사이더’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90세에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에서 자살 사건에 휘말린 부유한 추리 작가 역에 나서는 등 말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2008년 미국 영화 채널 ‘터너 클래식 무비’와 인터뷰에선 “(초창기) 제 역할은 긴장하고 도시적이고 세련된 청년들이었다. 지루하고 지루했다”면서 나이 들며 폭넓어진 역할의 자유를 환영했던 그다.  
 

여든둘에 아카데미 연기상 최고령 수상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을 통틀어 사상 최고령 수상 기록도 세웠다. 2010년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의 톨스토이 역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된 데 이어, 2년 뒤 여든둘에 ‘비기너스’로 남우조연상을 차지하면서다. 이 영화에서 고인은 아내를 여의고 불치병 선고를 받은 뒤 아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는 노인을 연기했다. 당시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무대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당신은 나보다 겨우 두 살 위다. 내 평생 어디에 가 있었냐” 말한 소감도 화제가 됐다. TV 드라마 ‘머니체인저’ ‘매들린’으로 1977‧94년 각각 에미상을 수상한 고인은 이로써 잉그리드 버그만, 제레미 아이언스 등에 이어 오스카‧에미‧토니상까지 ‘연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19번째 배우가 됐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에서 석유 재벌 장 폴 게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 [사진 판씨네마]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에서 석유 재벌 장 폴 게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 [사진 판씨네마]

2017년엔 석유 재벌 장 폴 게티의 실화 영화 ‘올 더 머니’로 여든여덟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역대 최고령 연기상 후보 지목 기록까지 세웠다. ‘올 더 머니’에서 고인은, 원래 주연 배우였던 케빈 스페이시가 성범죄 혐의 기소로 하차하면서 개봉 6주 전 합류해 주연 분량을 완전히 재촬영하는 내공을 발휘했다. 연출을 맡은 리들리 스콧 감독은 당시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이 남자는 진짜 색칠공부 책이다. 뭐든 할 수 있다”고 감탄했다.  
고인은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1970년 세 번째 백년가약을 맺은 영국 배우 출신 테일러와 금슬을 자랑했다. 유족으론 첫 아내인 미국 배우 겸 가수 타미 그림스 사이에서 얻은 외동딸 배우 아만다 플러머도 있다.  
 

헬렌 미렌 "남자로나 배우로나 강력했다"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함께 주연한 배우 헬렌 미렌(왼쪽부터). [사진 씨씨에스미디어]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함께 주연한 배우 헬렌 미렌(왼쪽부터). [사진 씨씨에스미디어]

별세 소식에 할리우드에선 애도가 물결쳤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 호흡 맞춘 배우 헬렌 미렌은 여러 외신에 전한 공식 성명에서 “그는 남자로서나 배우로서나 강력했다. 직업에 대한 헌신에 있어선 19세기적인 의미의 배우였다”면서 “겁없고, 활기차고, 용감하고, 박식하고, 전문적이고, 배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기념비적인 배우였다”고 했다. ‘비기너스’의 마이크 밀스 감독 역시 성명에서 “크리스토퍼와 함께 일해 큰 영광이었다”며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80대였는데, 크리스토퍼는 위엄 있고 짓궂으며 교양이 깊었고 항상 좋은 웃음을 찾고자 했다”고 했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함께한 배우 크리스 에반스는 자신의 트위터에 “진정 가슴 아픈 일이다. 믿을 수 없는 손실이다”라고 썼다. ‘업’의 피트 닥터 감독은미국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에 “플러머씨는 오손 웰스 같은 배우들과 함께 50년 이상의 경험을 가져다준 배우”라며 “그는 자신만만하고 완고했지만, 또 약속을 잘 지켰다. ‘업’에서 찰스 먼츠 역을 녹음했을 때 모든 테이크가 강하고 솔직하고 신뢰 가고, 우리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차원과 깊이를 가져다줬다”고 전했다. 배우 휴 잭맨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의 연기 영웅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소식에 매우 슬프다”며 “나는 그의 (연극) ‘리어왕’을 보고 첫 장면부터 울었다. 그것은 그저 순수한 완벽이었다”고 남겼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성명에서 “대단한 남자, 대단한 재능, 대단한 삶”이라고 애도했다.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90세에 선보인 범죄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90세에 선보인 범죄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