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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 떠난 펑위샹 “장제스는 제2의 히틀러”

중앙선데이 2021.02.06 00:21 723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3〉

1935년 12월 2일, 항일을 결심한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와 다섯째 중간)와 펑위샹(앞줄 오른쪽 여섯째 뒤쪽)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들과 쑨원 능을 참배했다. 앞줄 오른쪽 여덟째가 중앙집행 위원장 위유런(于右任). [사진 김명호]

1935년 12월 2일, 항일을 결심한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와 다섯째 중간)와 펑위샹(앞줄 오른쪽 여섯째 뒤쪽)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들과 쑨원 능을 참배했다. 앞줄 오른쪽 여덟째가 중앙집행 위원장 위유런(于右任). [사진 김명호]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양국이 무력 충돌했다. 국·공 양당은 합작을 선언하고 대일 항전에 돌입했다. 2년 전 태산(泰山)에서 하산, 수도 난징(南京)에 와있던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항전 결정에 갈채를 보냈다. 장도 펑을 우대했다. 제3전구(戰區)사령관과 6전구사령관에 임명했다.
 

펑, 공산당원·국민당 좌파와 교류
장, 6전구 없애 펑의 군 지휘권 박탈
저우언라이, 비밀리에 펑과 접촉

펑, 정치협상회의 참석차 귀국하다
소련 영해서 여객선 화재로 사망

중공 대표 자격으로 난징에 체류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통전(統戰)의 고수였다. 펑에게 눈독을 들였다.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들이 펑위샹의 집무실을 넘나들었다. 장제스는 펑위샹이 사령관인 제6전구를 없애버렸다. 측근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좌파들과 접촉이 빈번하다. 병력 지휘 맡겼다간 무슨 일 벌일지 모른다. 경이원지(敬而遠之)하며 동태를 살펴라.” 펑은 군을 지휘할 일이 없었다. 국민정부와 함께 전시수도 충칭(重慶)으로 이주했다. 저우언라이는 비밀당원 젠보짠(翦伯贊·전백찬)에게 밀전을 보냈다. “충칭으로 가라.” 후난(湖南)성에서 중소문화협회를 이끌던 젠은 짐을 꾸렸다. 펑은 폐교로 변한 중학교에 거주했다. 하루는 저우언라이와 만난 자리에서 고충을 토로했다. “일전에 사람들 만난 자리에서 역사 얘기 나눴다. 가정교사 구해 제대로 배우고 싶다.” 저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젠보짠을 추천했다.
  
펑위샹, 폐교서 살며 역사 공부
 
1948년 4월, 뉴욕 거리에서 장제스 지원 반대 연설하는 펑위샹. [사진 김명호]

1948년 4월, 뉴욕 거리에서 장제스 지원 반대 연설하는 펑위샹. [사진 김명호]

펑리다(馮理達·풍리달)의 구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부친은 젠보짠을 존중했다. 부관들을 교실에 대기시키고, 직접 문 앞에서 젠을 안내했다. 수업은 점심시간 빼고 7시간씩 했다. 부친은 젠보짠의 강의를 열심히 필기했다. 손님이 오면 같이 들었다. 소문이 나자 방문객이 줄었다.”
 
펑위샹은 역사를 공부한 다음부터 세상 보는 눈이 밝아졌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한번은 백주에 장제스 만나러 갈 때 등불을 들고 갔다. 의아해하는 장에게 심한 농담을 했다. “위원장은 역사 공부 안 해서 좌우가 깜깜하다. 그래서 들고 왔다. 역사를 어설프게 아는 지도자는 독재자가 되기 쉽다.” 젠은 펑위샹에게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 중국사강(中國史講)과 중국사논집(中國史論集)으로 학계에 자리를 굳혔다.
 
항일전쟁 승리 후 펑위샹은 난징으로 돌아왔다. 장제스와의 모순은 하루가 다르게 격화됐다. 가는 곳마다 특무들이 따라다녔다. 펑은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의 수리시설을 둘러보겠다. 가족과 함께 출국하고 싶다.” 장은 가족 동반은 수락하지 않았다. 재차 요구하자 조건을 달았다. “부인 리더촨(李德全·이덕전)이 국민당에 입당하고 딸 펑리다는 삼민주의청년단에 가입해라. 당원이나 단원이 아니면 여권 발행이 불가능하다.” 펑이 거절하자 장이 양보했다. “막내딸만 놓고 가라. 교육은 우리가 책임지겠다.” 1년 후 아들과 막내딸도 미국으로 보냈다.
 
1946년 9월 2일 펑위샹 부부는 난징을 떠났다. 이튿날, 상하이 부두에서 저우언라이와 덩잉추(鄧潁超·등영초)의환송받으며 미국행 배에 올랐다. 펑리다의 구술을 소개한다. “부친은 생애 마지막 2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영어는 혼자 외출해도 될 정도였다. 1947년 5월, 청년학생들의 반기아(反飢餓), 반내전(反內戰), 반박해(反迫害) 운동이 벌어졌다. 국민정부의 진압은 가혹했다. 소식을 접한 부친은 격노했다.”
 
소련 유학 시절의 펑리다(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소련 유학 시절의 펑리다(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 화교신문에 조국 동포에게 보내는 서신을 게재했다. 국민당 정부의 폭행을 비난하며 내전 중지와 마오쩌둥이 제창한 연합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주변에 낯선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우편함엔 연일 협박편지가 가득했다. 뉴욕의 민주인사들이 펑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동부에 평화민주연맹을 조직해 미국의 장제스 지원 반대 운동을 전개하자.” 펑은 딸 리다와 비서 뤄위안쩡(羅元錚·나원쟁) 데리고 뉴욕으로 갔다. 중도에 차 안에서 두 사람에게 결혼을 권했다. “결혼선물은 말로 대신하마. 나는 평민 출신이다. 노동자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손을 보호해라. 사람은 손만 멀쩡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  
 
뉴욕에 도착한 펑위샹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패의 원천인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축소판, 제2의 히틀러”라며 장제스를 맹공했다. 상·하원 의원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펑위샹이 귀국해 집권할 의사가 있으면 대포, 무기, 자금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의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제스, 미국에 펑의 추방 요청
 
장제스는 펑위샹을 당에서 축출했다.  
 
“행동이 경박하고 언사가 불량하다. 당의 규율을 휴지로 만들었다.” 미국에 펑의 추방도 요청했다. 내전 승리를 확신한 중공은 펑이 소련을 경유해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오가는 선편이 없었다. 미국주재 소련대사가 극성을 떨었다. 직원 자녀 200여 명과 중앙위원 4명의 귀국을 이유로 특별여객선 출항을 성사시켰다.
 
1948년 7월 31일, 펑위샹 일행은 극비리에 뉴욕을 떠났다. 뉴욕타임스가 펑위샹의 실종을 대서특필했다. 펑위샹은 여객선 1등실에서 유유자적했다. 9월 1일 오전 선장이 방송을 했다. “흑해에 진입했다. 이제부터 소련 영해다.” 오후 3시 화마(火魔)가 여객선을 덮쳤다. 100여 명이 사망했다. 펑과 막내딸도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소련 정부는 성대한 영결식을 열고 리더촨을 위로했다. “딸과 아들은 우리가 교육을 전담하겠다.” 펑리다는 모스크바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리더촨은 남편의 유골함을 안고 홍콩으로 갔다.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할 민주인사들과 원산을 거쳐 동북에 안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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