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한산성 쌓은 장태흥, 국보 '기사계첩' 그린 장태흥이었다

중앙선데이 2021.02.06 00:02 723호 24면 지면보기
북한산성 대성문 각자. 禁營 監造牌將 張泰興(금영 감조패장 장태흥)이라고 새겨져 있다. 장태흥은 북한산성 대성문과 대동문 축조를 감독한 뒤 궁정 화가가 돼 국보 '기사계첩'을 그렸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대성문 각자. 禁營 監造牌將 張泰興(금영 감조패장 장태흥)이라고 새겨져 있다. 장태흥은 북한산성 대성문과 대동문 축조를 감독한 뒤 궁정 화가가 돼 국보 '기사계첩'을 그렸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대성문 남쪽 입구에 장태흥이란 이름이 명함처럼 박혀있다. ‘금영 감조패장 장태흥(禁營 監造牌將 張泰興)’. 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산성을 만든 삼군문 중 금위영 소속으로, 공사를 지휘·감독한 장수란 뜻이다. 장태흥(張泰興·?~?)은 조선의 무관이다. 그리고 화원(畵員)이다. 군인인데 조정의 화가라니, 무슨 스토리인가.
 

북한산 암각 스토리
김성근, 일제 강점기 때 작위 받은 '조선 귀족'
고종 측근인 경기감사 심상훈, 갑신정변 와해

그에 관한 기록은 적다. 우선 비변사등록(조선 중·후기 최고 회의기관 비변사의 일지). 1711년 10월 21일(음력) 기사는 그가 숙종의 명을 받들어 북한산성 축조에 나선 140여 명 중 한 명임을 보여준다. 직책을 ‘교련관 전 사과’로 적고 있다. 그는 대성문을 쌓는다. 대동문 축성도 감독했다. 
 
그의 파트너 석수편수 김선운(石手邊首 金善云)도 옆에 이름을 남긴다. 310년 전의 흔적이다. 북한산에서 만난 이진경(26)씨는 "옛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만지면 그 시대와 소통하는 듯한 전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연구사는 “이런 각자성석(刻字城石)은 ‘공사실명제’를 뜻하는데, 성벽 붕괴 등 문제가 생기면 엄하게 다스려졌다”고 설명했다. 산성의 정문 격인 대서문은 물론 대동문·대남문·보국문 등에도 각자성석이 있다. 한양도성·수원화성 등 다른 성에도 있다.
북한산성 대남문 각자. 御營 □□□ 朴大成 (어영 □□□ 박대성)이라고 새겨져 있다. 대남문 남쪽 입구 좌측에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대남문 각자. 御營 □□□ 朴大成 (어영 □□□ 박대성)이라고 새겨져 있다. 대남문 남쪽 입구 좌측에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대동문 각자. □□□官金益麗 伩任興(혹은 典)秀 鄭冝済 將鄭啓運 月日改違(□□□관김익려 유임흥(혹은 전)수 정의제 장정계운 월일개위)로 새겨져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대동문 각자. □□□官金益麗 伩任興(혹은 典)秀 鄭冝済 將鄭啓運 月日改違(□□□관김익려 유임흥(혹은 전)수 정의제 장정계운 월일개위)로 새겨져 있다. 김홍준 기자

장태흥은 북한산 암각에 나오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시대 불명의 ‘작품’부터 비교적 최근의 ‘낙서’까지 북한산 암각은 곳곳에 드넓게 자리 잡고 있다. 애초에 선조들이 풍류로, 혹은 '왔다 감'의 표시로 남긴 암각을 낙서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래서 추렸다. 경기문화재단의 2014년 북한산성 학술조사 자료에 나온 44개의 금석문·암각 중, 접근과 해석이 비교적 쉬운 것들이다(그래픽·사진 참조).

북한산 대서문 옆 수문이 있던 자리를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 칠유암(七遊巖) 각자가 있다. 석재 윤행임은 『 북한기(北漢記) 』에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의 평장사 민지(閔漬)가 6명의 지인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 바위 이름을 정했다"고 썼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대서문 옆 수문이 있던 자리를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 칠유암(七遊巖) 각자가 있다. 석재 윤행임은 『 북한기(北漢記) 』에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의 평장사 민지(閔漬)가 6명의 지인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 바위 이름을 정했다"고 썼다. 김홍준 기자

# 장태흥, 1713년 '특채' 통해 화원의 길로
북한산성은 1711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만에 속전속결 완성된다. 이후 ‘무관 장태흥’은 기록에서 더는 볼 수 없다. 1713년 그의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이번엔 '화원 장태흥'이다. ‘도감(都監, 임시 관청)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화사(畫士) 진재해(秦再奚)·장태흥(張泰興) 등도 같이 들어왔는데…(숙종실록 1713년 4월 22일).’ 그해 조정에서 ‘특채’로 화원을 뽑았다. 이 장태흥이 그 장태흥인가.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박 연구사는 "1713년에 간행된 『어용도사도감의궤』에 ‘화사 장태흥은 금위영 소속의 교련관’이라고 적혀 있어 그 장태흥이 맞다"고 확인했다. 그는 “조선 시대에 무관이 화원으로 신분 이동을 한 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라고 밝혔다. 
 
장태흥은 다시 이름을 남긴다. 2018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한 ‘기사계첩(耆社契帖)’을 그린 화원 중 한 명으로다. 기사계첩은 1719년 숙종이 ‘기로소(耆老所, 연로한 신하들을 예우하기 위한 기구)’에 들어가는 것을 기리기 위한 5폭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화원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장태흥은 사적 162호 북한산성과 국보 325호 기사계첩을 모두 만들었다는 얘기다. 지난 2014년에는 장태흥이 속한 금위영의 북한산성 유영지 근처에서 '금위영(禁衛營)' 각자가 발견됐다. 
 국보 325호 '기사계첩'에는 제작에 참여한 화원들의 이름이 수록돼 있다. 사진은 기사계첩의 일부와 화첩의 맨 마지막에 적힌 장태흥의 이름.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325호 '기사계첩'에는 제작에 참여한 화원들의 이름이 수록돼 있다. 사진은 기사계첩의 일부와 화첩의 맨 마지막에 적힌 장태흥의 이름.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 산성계곡 산영루 건너편에 김성근(金聲根·오른쪽)과 안사 심사훈(按使沈相薰)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김성근(1835~1919)은 조선 말기의 문신·서예가이고, 심상훈((1854~1907)은 고종 21년(1884)부터 고종 22년(1885)에 경기감사를 지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산성계곡 산영루 건너편에 김성근(金聲根·오른쪽)과 안사 심사훈(按使沈相薰)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김성근(1835~1919)은 조선 말기의 문신·서예가이고, 심상훈((1854~1907)은 고종 21년(1884)부터 고종 22년(1885)에 경기감사를 지냈다. 김홍준 기자

# 김성근·심상훈, 고종 밑에서 함께 일해
‘김성근(金聲根)’ 암각은 추사 김정희가 칭송해 마지않던 산영루 앞 바위에 있다. 눈에 잘 띈다. 경기문화재단은 이 각자의 주인공이 전라관찰사·의정부찬정 등을 지낸 김성근(1835~1919)으로 보고 있다. 1910년 10월 8일 자 매일신보는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76명의 명단을 게재한다. 그중 한 명이 김성근(자작)이다. 이들은 ‘조선 귀족’으로 불렸다. 일본은 1910년 ‘조선 귀족령’을 선포한다. 1947년 폐지되기 전까지, 세습을 포함해 총 158명이 조선의 귀족이 됐다. 1919년 김성근이 죽자 작위 계승을 놓고 서자와 양자로 얽힌 후손들이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매일신보).

 

김성근 각자 바로 왼편에는 ‘안사심상훈(按使沈相薰)’이 새겨져 있다. 안사는 관찰사·감사로 부르기도 한다. 심상훈(1854~1907)이 경기감사로 재임한 기간은 짧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84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다. 이때 각자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에 갑신정변(12월 4일)이 일어난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고종과 민비의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기도록 한다. 이튿날 아침 심상훈이 개화당의 일원으로 가장하고 경우궁에 들어간다. 심상훈은 고종의 이종사촌이요, 민비의 친족이다. 심상훈이 민비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면서 청나라를 끌어들여 개화당의 정변을 와해시킨다(한민족독립운동사). 
 
심상훈은 경기감사 직후 충청감사로 옮겨 동학혁명을 진압하기도 했다. 반러 의병활동을 했고, 친러로 기울던 시기에 탁지부(조선 말기 재정을 관장하는 관청) 대신을 맡았다(여주시사). 을사늑약 때 자결하려고 했으나 고종이 만류했다고 한다.
 

김성근과 심상훈은 동시대 사람이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21일 양력 1번째 기사는 ‘의정부 참정(대신 다음 서열의 관직) 김성근, 내부(내무행정을 관장하던 관청)대신 심상훈 등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산영루 앞 이들의 두 개 암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일본·청나라·러시아 사이의 격변 와중이었다.
북한산 용학사 근처의 백운동문 각자. 백운동에 들어섰음을 알려주고 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불분명하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용학사 근처의 백운동문 각자. 백운동에 들어섰음을 알려주고 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불분명하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부암사(부왕사, 부황사) 터 근처에 새긴 청하동문(靑霞洞門) . 청하는 ‘푸른노을’이라는 뜻이며, 일붕기도처와 같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부암사(부왕사, 부황사) 터 근처에 새긴 청하동문(靑霞洞門) . 청하는 ‘푸른노을’이라는 뜻이며, 일붕기도처와 같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사기막골(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청담동(淸潭洞) 암각. 사기막골 물이 맑다고 해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사기막골(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청담동(淸潭洞) 암각. 사기막골 물이 맑다고 해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김홍준 기자

# 사대부가 글씨 쓰면 승려가 새기기도

산을 찾는 게스트가 사대부라면, 호스트는 주로 승려(혹은 백성)였다. 박 연구사는 “당시 승려들은 고승급이 아니라면 사대부가 산에 들어올 때 숙소(절)를 제공하고 문화해설사·가마꾼 노릇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사대부의 실족·추락을 막고자 끈으로 연결하거나 업어서 이동하는 안전지킴이 역할까지 했다. 금강산이 불교식 이름이라며 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사대부의 위세는 대단했다. 사대부가 글씨를 쓰면 승려가 이를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승려들은 대가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세금을 감면받기도 했다. 

 
권상호 문화전문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훌륭한 암각·금석은 호문(好文, 좋은 글씨), 호서(好書, 좋은 글귀), 호각(好刻, 좋은 새김)의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산 용출봉과 용혈봉 사이 절벽에 새긴 紫明海印臺(자명해인대). 자명해인은 산자수명(山紫水明)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줄임말로 산은 단풍이 들어 붉고 물은 맑으며, 바다와 같은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용출봉과 용혈봉 사이 절벽에 새긴 紫明海印臺(자명해인대). 자명해인은 산자수명(山紫水明)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줄임말로 산은 단풍이 들어 붉고 물은 맑으며, 바다와 같은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김홍준 기자

승려와 교유하거나 기도를 위해 산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영친왕의 보모이자 조선의 마지막 여성 시인, 김천 고등보통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1855~1939)은 북한산 부왕사를 찾았다. 그 절터 근처에 ‘최송설당(崔松雪堂)’ 각자가 있다. 1915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흔적이 보이는 암각도 있다. 백운봉암문 근처 ‘白雲台三OO米’는 백운대 정상이 300m 남았음을 표시한다. 우리나라 미터법은 1894년 들어왔다. ‘米’는 일본과 중국에서 '미터(m)'를 표시하는 데 쓴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는 백운대의 '대(臺)'를, 약자 '태(台)'로 쓰지 않았다"며 "일본에 이어 중국이 썼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백운대 오르는 길에 쇠줄이 놓이며 일반인도 오르기 시작한 게 1927년. 그즈음에 이 암각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에는 3·1운동 암각문이 있으니, 격랑의 북한산이었다.

훈련도감 터의 바위에는 日ㆍ月ㆍ星ㆍ戊ㆍ八卦ㆍ將ㆍ后天付ㆍ天符倧壇紫戊院 戊鼎金龜淵(일ㆍ월ㆍ성ㆍ무ㆍ팔괘ㆍ장ㆍ후천부ㆍ천부종단자무원 무정김구연)이 새겨져 있다. 「북한산과 무속신앙」은 '훈련도감 유영지는 무법대(戊法臺)라고 하는 기도터로 1905년 김구연(金龜淵)이 세운 일종의 제천단(祭天壇)'이라고 적고 있다. 이 곳은 2인 이상이 암벽등반 장비를 갖추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김홍준 기자

훈련도감 터의 바위에는 日ㆍ月ㆍ星ㆍ戊ㆍ八卦ㆍ將ㆍ后天付ㆍ天符倧壇紫戊院 戊鼎金龜淵(일ㆍ월ㆍ성ㆍ무ㆍ팔괘ㆍ장ㆍ후천부ㆍ천부종단자무원 무정김구연)이 새겨져 있다. 「북한산과 무속신앙」은 '훈련도감 유영지는 무법대(戊法臺)라고 하는 기도터로 1905년 김구연(金龜淵)이 세운 일종의 제천단(祭天壇)'이라고 적고 있다. 이 곳은 2인 이상이 암벽등반 장비를 갖추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김홍준 기자

노적사 뒤에는 해와 달과 별이 새겨진 바위도 있다. 암벽등반을 위해 장비를 갖춘 이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는 지역에 있다. 속 시원히 보려면 해와 별과 달이 수십, 수백 번 바뀌는 동안 기다릴 수밖에.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