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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노무현의 꿈

중앙일보 2021.02.05 00:39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과거팔이가 문재인 정권의 특징인 줄 알았다. 정권 내내 적폐 청산, 토착 왜구 타령이어서 과거를 부정하는 방향성만큼은 뚜렷하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제징용 판결을 놓고 “강제집행 방식의 현금화보다는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급변침했다. 외교적 해법이란 게 바로 전 정부가 만든 한·일 합의였다. 그걸 깬 당사자가 지금 정부다. ‘사법부 판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며 죽창가를 불렀다. ‘유니클로 입는 검찰총장은 친일파’란 친일몰이로 이어졌다. 그래 놓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산으로 간 재난지원금 난제
‘여·야·정 협의체’서 논의하면
정치·정책 단번에 힘 받는다

적폐 청산이 같다. 말로는 죄다 전 정부 탓이라면서 정작 아집과 행태는 빼닮았다. 유체이탈 화법 아니면 선택적 침묵이다. 코로나 백신이 문제되자 대통령은 참모들을 꾸짖었다. 메르스 사태 때 “여객선이 침몰해도 우왕좌왕, 치명적 전염병이 돌아도 우왕좌왕, 지금 이 나라를 무정부 상태로 만든 건 정부 자신”이라고 나무라던 전임자 방식이다. 재·보궐 선거에 책임이 있으면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당규를 만든 분이 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이다. 지금 여당이 4월 보궐선거에 후보를 낸다면 뭔가 언급이 있어야 할 텐데 가타부타 말이 없다.
 
‘추미애·윤석열 갈등’이 그런 식으로 1년을 끌었다. ‘조국 사태’도 다르지 않다. 지금은 ‘북한 원전 지원’이다. 청와대는 ‘사실과 다른 혹세무민’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 설명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우린 다르다’는 셀프 칭찬에 맞장구가 크지 않다. 만약 전임자 실정으로 정부 신뢰도가 급전직하 추락했다면 적폐청산 정부 신뢰도는 수직 상승해야 한다. 숫자가 그렇지 않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 이전 같은 조사에서도 역대 정부에 대한 신뢰는 똑같이 형편없었다. OECD 평균을 넘어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원님 재판 같은 정치를 누가 따르겠나.
 
그런데도 어제와 같은 오늘을 되풀이하면서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말한다. 정권마다 예외가 없다. 보통 사람은 못 그런다. 그러면 당장 이상한 사람 취급 받고 왕따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두 같은 길을 걷다 같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댄다. 대통령이 선출된 왕이고 대한민국은 ‘인치(人治)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게 없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그때그때 다르다. 유일하게 안 되는 건 대통령 권한을 나누는 일이다. 문 대통령 역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고치겠다던 공약을 조금이라도 이행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민이 바라는 ‘좋은 대통령’은 다음에도 어렵다고 본다. 구조가 바뀐 게 없어서다. 단 한 표만 더 얻어도 나라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는 게 우리 대통령제다. 진 쪽은 적폐다. 이긴 쪽은 5년 내내 적폐 박멸에 골몰하고, 시간 되면 또 새로운 왕을 뽑는다. 나라는 갈가리 찢겼다. 게다가 우리 선거는 이제 나랏빚으로 돈 뿌려 표를 사는 전형적인 남미식 ‘표(票)퓰리즘’으로 가고 있다. 더 무책임하고 뻔뻔한 사람이 이기는 진흙탕 싸움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제를 여기서 끝장낼 수도 없다. 강력하다는 대권 주자들이 대통령제 폐지 개헌을 강력하게 방해할 게 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연정을 꿈꿨다. 정작 그때는 실패했다. ‘한나라당에 던졌는데 우리한테 폭탄이 터졌다’고 했다.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다. 정권의 국정 동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여당은 총선에서 압승했다.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에 합의했던 바로 그 여당이다. 지금 못할 이유가 없다. 4차 재난지원금이든, 북한 원전이든 지뢰밭 천지다. 서로 확 터놓아야 한다. 대통령비서실장이던 문 대통령은 대연정 논의의 한복판에 있었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 정부가 노무현의 정치 개혁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 그게 진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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