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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의 시선] 민주주의를 견디지 못하는 민주 정권

중앙일보 2021.02.05 00:23 종합 28면 지면보기
최현철 정책디렉터

최현철 정책디렉터

“각각의 입장은 각각의 ‘가치’를 담고 있고, 각각의 가치는 하나하나 절실하고 절절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여 그에 담긴 가치만을 수호하게 된다면 다른 하나의 입장과 그에 담긴 가치는 전혀 보호받지 못한 채 소외·배제되고 말 것이다. 과연 그것이 진실이고 정의일까.”
 

공론화위, 신고리 공사재개 결론
당황한 정권, 월성 폐쇄 무리수
설득과 시간 필요한 절차 못견뎌

2017년 10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석 달간의 활동을 마치면서 낸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대법관 출신 김지형 변호사가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의 고심이 흠뻑 묻어난다.
 
당시는 탈원전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크게 분출하던 시기였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2016년,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다. 국내에서 공식 지진 관측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지진이 월성 원전과 31㎞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자 당장 후쿠시마의 악몽이 소환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정권 초기에 구체적인 성과를 낼 기회였다.
 
신고리 5·6호기가 첫 타깃으로 꼽혔다. 원전이 밀집한 지역에 건설되는 데다, 허가 심의 과정이 부실했다며 논란이 계속되던 곳이었다. 문제는 이미 공정이 29%나 진행돼 중단하기에 애매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정부는 공론조사라는 카드를 불쑥 꺼냈다. 요즘 같아선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밀어붙였을 텐데, 당시만 해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여론 지형을 가장 잘 반영하는 표본집단을 뽑고, 양쪽의 주장을 충분히 들은 뒤, 질문과 토론을 거듭해 결론에 접근해 가는 숙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첫선을 보인 것이다.
 
그렇게 석 달을 공들여 나온 결론은 ‘공사 재개’였다. 관료와 이익집단을 배제하고 충분한 정보와 토론 기회가 있으면 ‘탈원전’의 명분이 이길 것이란 정권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만 위원회는 원전 축소의 방향으로 에너지정책을 추진하라는 추가 권고를 내놓았다. 단박에 생색을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권으로서도 탈원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셈이다.
 
과정은 더디고 결론조차 뜨뜻미지근해 보이지만 그 시점에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 시민 대표로 참여한 패널들의 반응도 좋았다. “생각이 변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조금은 다른 얘기가 들렸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졌지만 기꺼이 승복하고, 이겼지만 충분히 이해하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다림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불과 1주일 뒤, 정부는 에너지전환 로드맵을 발표했다. 공론화위 권고는 수용한다고 했다. 대신 노후원전 수명연장과 신규 원전 추진 불허 방침을 다시 천명했다. 월성 1호기와 신한울 3·4호기가 희생양이 됐다. 월성 원전의 무리한 폐쇄 작업의 씨앗은 이때 뿌려졌다.
 
사실 월성 1호기는 그냥 놔둬도 고사하는 곳이었다. 이미 2012년 30년의 설계수명을 다했다. 일부 보수작업을 거쳐 2015년 원자력안전위원회로부터 10년간 더 써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보강과 허가 과정은 여러모로 허술했고, 곳곳에서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2017년 법원은 수명연장 허가를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원안위가 항소를 했지만, 규정 위반이 명백해 항소심에서 뒤집어지기는 버거워 보였다. 2년만 기다리면, 설령 소송 결과가 바뀐다 해도 4년만 기다리면 자동 폐쇄되는 게 월성 1호기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이들에겐 ‘임기 내’가 중요하다. 공론화위원회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정권은 월성 1호기 즉시 폐쇄를 로드맵에 넣었다. 이듬해 6월 21일 발표한 에너지전환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논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원전의 경제성 평가를 왜곡했다. 요즘 문제가 되는 월성원전 사태의 전사(前史)다.
 
2019년 항소심 재판부는 소송을 각하했다. 이미 조기폐쇄 결정이 났으니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월성원전 연장 승인 과정의 온갖 문제점도 슬며시 묻혔다. 남은 것은 경제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공무원들이 숫자를 조작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업무용 컴퓨터에 있는 자료를 삭제한 범죄행위뿐이다.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더디고, 까다롭다. 절차를 지키려다 보면 피곤하다. 하지만 절차라는 것은 서로 옳다고 여기는 절절한 주장 중 하나를 거둬들이는 데 필요한 제례의식이다. 이 정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절차와 설득 과정을 견딜 의사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180석이라는 엄청난 의석을 얻고도 많은 것을 잃고 있다. 탈원전이라는 그들의 신념 또한 그렇게 힘을 잃어간다.
 
최현철 정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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