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앙시평] 당 대회가 누설한 북한경제의 비밀

중앙일보 2021.02.03 00:37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1994년 봄, 필자는 소련 공식자료에 나오지 않은 숨겨진 통계를 찾기 위해 모스크바 인근의 러시아 국립도서관 분관으로 향했다.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2시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서 흑빵 몇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며 백여 편의 경제학 박사 논문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새벽의 기대와 저녁의 실망이 반복되던 한 달 동안의 고달픈 여정은 결국 허탈함으로 끝났다. 거의 모든 논문에 숫자가 아예 없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어록을 인용한 장문의 도입부 뒤엔 경제학에 걸맞은 실증분석은 실종된 채 ‘이렇게 돼야 한다’란 당위만 잔뜩 나열돼 있었다.
 

경제통계를 늘 감추려던 북한이
제재 효과 유추 가능한 숫자 누설
김정은은 경제 현실 알지 못한 듯
당 대회서 해법 없이 투쟁만 외쳐

그래도 북한에 비하면 소련은 통계의 낙원이었다. 소련은 붕괴 직전까지 해마다 700쪽 되는 통계연감을 출간했던 반면 북한은 1960년대부터 통계연감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도입했던 나라 중에 통계연감이 없는 나라는 북한뿐이다. 1960년대 들어 경제성장률이 급감하자 이를 감추려 했을 것이다. 주체사상에 따라 숫자보다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북한은 ‘통계 없는 계획경제’라는 미몽(迷夢)에 빠졌을 수도 있다. 엉터리를 걸러내면 쓸 수 있는 소련 통계의 양이 100이라면 북한은 5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북한이 8차 노동당 대회에서 비밀의 일단을 풀 수 있는 숫자를 ‘깜짝 선물’했다. 바로 경제발전 5개년계획의 시멘트 생산목표가 800만 톤이라고 밝힌 것이다. 북한은 중요한 숫자를 감추기 위해 다양한 위장 전술을 펴왔다. 실제 생산량은 밝히지 않고 전년 대비 증가율만 발표하거나, 물가상승분을 성장률에 포함하여 경제성과를 부풀리는 것이 주요 수법이다. 이런 북한이 이번에는 생산 목표량을 그대로 발표한 것이다. 약속한 시멘트를 확실하게 공급하겠다는 결의를 너무 강조하려다 벌어진 실수일까. 아니면 “전 사회적으로 숫자를 중시하는 기풍을 세우라”는 재작년 8월의 김정은 지시를 받들기 위해서였을까.
 
5개년계획 기간이 끝나는 2026년의 시멘트 생산목표가 800만 톤이라면 2020년 실제 생산량은 최대 520만 톤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목표 생산량을 매우 높게 잡는 북한의 경향을 고려해, 2021년부터 5년 동안 시멘트 생산량이 연 9% 증가한다고 가정해 얻은 수치다. 이는 한국은행이 남한 국가기관 자료를 이용해 추정한 북한의 시멘트 생산량 추이와 잘 들어맞는다. 한국은행은 2016년과 2019년의 북한 시멘트 생산량을 각각 708만 톤, 560만 톤으로 추정했다.
 
시멘트 생산량 목표치를 밝힘으로써 북한은 의도치 않게 제재의 혹독한 효과를 누설하고 있다. 제재 실행이 본격화된 2017년부터 작년까지 시멘트 생산량이 25% 이상 급감했음을 간접 시인한 것이다. 원료의 수입이나 제품의 수출 비중이 높은 산업에 비해 시멘트 산업은 제재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국내에서 원료를 조달할 수 있을뿐더러 건설 수요만 뒷받침되면 판매에도 문제가 없는 내수 산업이다. 이런 산업도 제재로 인해 생산량이 4분의 1 이상 감소했다면 자력갱생을 내세우는 북한 정책이 어떤 종말을 맞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가계 생활고도 극심해졌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북한 이탈 후 1년이 되지 않은 탈북민을 해마다 조사한 자료를 이용하여 필자가 추정한 결과, 2017~19년 북한 가계소득의 중앙값은 2014~16년에 비해 평균 25% 감소했다. 시멘트 생산량 감소와 견주어 볼 때 이상하지 않은 수치다. 특히 제재 이전에 무역과 외화벌이로 큰돈을 벌었던 상위 20%에 속한 가계의 소득이 현저히 감소했다. 또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운 하위 20%의 소득 감소율도 중간계층보다 높았다.
 
북한 정권은 경제 현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무엇보다 가계소득과 지출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공식 통계는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 하더라도 실제와 매우 다를 것이다. 소득 대부분을 시장 활동과 밀수에서 벌고 있는 주민들이 수입과 지출을 정확하게 밝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밑바닥의 경제 내구력은 극한에 가까워지는데 김정은은 8차 당 대회에서 객관적 조건이 나빠도 주관, 주체, 신념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소련의 논문처럼 그의 연설도 “해야 합니다”만 반복하며 허공을 때리고 있다.
 
8차 당 대회 보고서는 현실 없는 열정, 해법 없는 투쟁의 위험한 설계도다. 김정은은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꿈꾸는 듯하다. 갑자기 양성평등 국가가 된 듯, 당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 중 10%가 여성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흉내는 내지만 정작 정상국가로 가는 길은 잃어버렸다. 1만5000㎞ 내의 어떤 목표물도 정확히 타격할 수 있는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야심은 800만 톤의 시멘트 생산목표와 양립할 수 없다. 이 혼란스러운 세 수치는 김정은의 사고가 얼마나 현실성과 일관성을 상실했는지 보여줄 따름이다. 그가 외치는 인민대중 제일주의가 진심이라면 핵·미사일 개발과 경제발전 중 무엇이 인민을 위한 길인가. 그의 명운도 이 선택에 따라 갈릴 것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