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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나는 왜 목숨 걸고 북녘 동포에게 전단을 날려보냈나

중앙일보 2021.01.28 00:24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민복 전 북한농업과학원 연구원·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이민복 전 북한농업과학원 연구원·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북한 정권은 주민들에게 “김일성 주석이 항일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미제와 싸워 나라를 지켰다”며 신격화해왔다. “미제와 괴뢰가 북침해 강산을 잿더미로 만들고 수백만 인민을 죽였다”고 세뇌해왔다.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일본과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긴다. 남북 통일이 안 되는 것도 6·25전쟁에 대한 극명한 인식 차이와 증오 때문이다.
 

33세 때 대북전단 보고 탈북 결심
폐쇄사회에 진실 전할 최후 수단

하지만 필자는 경악할 만큼 정반대의 진실을 33세 때 ‘삐라’(대북전단)를 보고 처음 깨달았다. 전단을 읽으면서 진실을 알게 된 필자는 자유를 찾고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1990년 탈북해 중국·러시아를 거쳐 1995년 자유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입국 직후 관계 당국의 조사에서 “삐라는 북한 정권엔 원자탄보다 더 위력적인 효과를 가져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조건으로 제시한 김정일 위원장의 대북 전단 중지 요구를 김대중 정부가 수용했다. 눈과 귀가 가려진 북한 동포의 원초적 인권과 알 권리를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은 셈이었다.
 
‘관군’이 손을 놓으니 ‘의병’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였던 필자는 5년간 미친 듯이 연구에 몰입해 민간인도 대북전단을 날릴 수 있는 특허를 받았고 북한 동포에게 진실을 날려 보냈다. 북측은 수백 차례 협박과 암살시도를 했고, 급기야 대놓고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만들라고 문재인 정부를 압박했다. 북한에 달러를 보내고 “대북전단은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한 정치인이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됐으니 경악할 일이다. 설마 했는데 전단 금지법이 지난해 12월 말 국회를 통과했다. 북한의 역대 대남공작 기관이 못해낸 쾌거에 김씨 남매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금지법을 뜯어보면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위배한다는 거창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초보적인 상식과 사실에도 어긋난다. 첫째, 당국끼리 한 약속을 민간까지 지키라고 강제했는데 이는 독재 국가의 발상이다. 둘째, 북한은 사이버 공간에서 일방적인 심리전에 혈안인데 남측만 수단이 묶였으니 불공평하다. 셋째, 표현의 자유를 표방하는 국민 보호가 아니라 가해자를 편드는 법이라 문제다.
 
넷째, 대북 전단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공개 전단과 달리 비공개적으로 보내는 전단은 열도 소리도 없어 레이더와 맨눈으로 보이지 않아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이런 사실을 무시했다. 다섯째, 무자격자의 공개적 대북전단 살포 행위는 경찰직무집행법과 가스안전관리법으로 처벌하면 충분하다. 여섯째, 경기도는 법적 근거도 없이 접경 지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더니 필자의 대북 전단 장비를 부당하게 회수했는데 이는 직권남용이다.
 
이처럼 얼토당토않은데도 정부와 여당이 전단 금지법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만 바라보고 북한이 원하는 대로 하면 남북 문제가 풀린다고 착각하기 때문 아닌가. 하지만 냉정한 역사는 그렇게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웅변한다.
 
2000년 6·15선언 이후 북한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넘쳐날 때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용기 있게 일갈했다. “북한의 속성상 중국 같은 개혁·개방을 못 한다. 북한 인민을 각성시키는 것보다 더 빠른 지름길은 없다.” 외부 세계와 연결된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는 ‘유일한 폐쇄 국가’ 북한에 보내는 전단은 북한 주민을 각성시킬 유일한 수단이다.
 
“대북 포용 정책 추진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인권을 외치는 탈북 단체를 억압해왔다”고 비판한 브루킹스연구소 정 박(한국명 박정현) 한국석좌가 미국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에 임명됐다는 소식은 그래서 반갑다. 탈북자를 압박하고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해 숨이 막히던 참에 그래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민복 전 북한농업과학원 연구원·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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