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분쟁절차 시작되자 항의 한마디 안 해
공약 띄울 호재로 활용한 의심 사
분쟁 일단락되자 강한 유감 표명
'노력'을 '의무'로 포장해 압박한다는 것
FTA 상으로는 '노력'조항이지만
ILO 협약 비준하면 '의무'조항
정부, "ILO 협약 2월 비준 노력" 밝혀
ILO 협약에 유감표명한 꼴이 돼
대체복무에 ILO는 "협약 위반"
정부 "선택권 주면 위반 아냐"
위반 판단 ILO 몫…바뀐 적 없어
정비 없이 비준하면 국제제재 초래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019년 4월 9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집행위원과 면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유감을 표명한 건 패널 보고서에 포함된 권고사항에 대해서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 간부를 종업원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도록 그 선임 권한을 노조에 맡기라는 대목이다. 기업별 노조가 주를 이루는 한국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들다. 정부는 "노력 조항을 의무인양 압박한다"고 봤다.
한데 정부가 이렇게 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한 게 앞뒤가 영 맞지 않는다. 박화진 고용노동부 차관이 이날 패널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ILO 핵심협약이 2월 국회에서 비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패널이 권고한 사항은 FTA 상으로는 '노력' 조항이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의무'가 된다. '유감 표명'의 대상이 안 된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 안 지키면 무역보복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게 된다. 패널 보고서의 권고가 역설적으로 ILO 핵심 협약 비준의 함정을 안내해준 셈이자, 정부가 ILO 핵심협약에 유감을 표명한 꼴이 됐다.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면 어렵게 통과된 노조법도 상당 부분 효력을 잃는다. ILO 협약이 법률적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신법(新法) 우선의 원칙에 따라 기존 노조법과 배치되거나 충돌하는 사안은 ILO 협약을 적용하게 되고, 노조법의 관련 조항은 폐기 또는 정지되는 운명에 놓인다. 한·EU 전문가 패널이 한국에 한 권고도 '노력'이 아닌 '의무'가 된다. 아무리 유감을 표명해봤자 소용없다. 따라야만 하는 법적 효력을 갖는다.

ILO 총회 장면
정부는 민감한 군 복무 문제와 관련해선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현역으로 복무할 것인지,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할 것인지 당사자가 선택하도록 선택권을 주면 문제가 없다"는 해석을 내놨다. '누가 현역 복무를 택하겠는가'라는 비아냥은 둘째 치고, 이건 정부 자체 해석일 뿐이다. ILO 협약 위반 판단은 우리 정부가 아니라 ILO가 한다. 우리가 문제없다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ILO는 이 문제와 관련, 한국처럼 강제징집하는 터키와 이집트가 필요 인원을 초과한 징집병을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배치하자 '위반'이라고 판정했다. 2007년 8월 한국의 질의에도 같은 대답을 이미 회신했다. 2009년과 2012년 ILO 이사회에서 물었을 때도 ILO는 같은 답을 했다. '군사적 목적과 관련이 없는 것은 병역 의무로 볼 수 없다. ILO 협약 위반이다'고 한국 측에 전했다. 이런 ILO의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적 없다.
정부가 현 정부 이전까지 "ILO 협약 비준이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느닷없이 '군 복무 선택권'을 내세워 "ILO 협약 위반이 아니다.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판단의 주체인 ILO를 젖혀두고, 문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하려 국제사회의 규범조차 짜맞추기식으로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학계 등에서 이런 정부의 갈라파고스식 해석으로 통상문제와 제재가 불거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하는 건 이 때문이다. 자칫하면 통상 압력의 트랩을 우리가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