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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영의 시선] 사면은 희망·요구·거래의 대상 아니다

중앙일보 2021.01.22 00:20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가영 논설위원

이가영 논설위원

역사의 가정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하곤 한다. 그것도 종종. 만일 2008년 총선 직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만난 당시 친박무소속연대 김무성(전 새누리당 대표)의 허그를 동지애로 받아줬더라면 어땠을까. 2015년 집권당 원내대표이던 유승민(전 바른정당 대선후보)의 쓴소리에 “그런 얘긴 청와대에서 하자”며 씨익 웃었더라면 무슨 상황이 전개됐을까. 2016년 총선에서 ‘진박 감별사’를 내세우는 대신 “천하의 인재를 찾으라”며 여당의 어깨를 두드렸더라면 총선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애국심 독점·불신이 부른 탄핵
박근혜 수감, 한국 정치 현실 상징
정쟁 멈추도록 대통령 결단해야

 
지난 14일 박 전 대통령의 22년형 확정을 보면서 떠오른 대목들이다. 박근혜가 정치사에 남긴 다수의 흔적 중 굳이 이것들을 들추는 건 그 스스로가 첫 탄핵 대통령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박 전 대통령에겐 많은 죄목이 붙었다. 직권남용, 뇌물, 공천 개입 등 19개의 혐의가 22년의 형기에 꽉꽉 담겼다. 올초 대법원 최종 판단을 앞두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사면론을 띄웠지만 반대 여론에 부딪혀 쑥 들어갔다. 여권에선 “반성과 사과가 먼저”란 주장이 나왔다. 탄핵 주도 세력에 무릎을 꿇으라는 의미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진정으로 사과하고 반성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무엇보다 첫 여성 대통령에 기대를 걸었으나 크나큰 실망감과 치유가 어려운 상처를 입은 국민에게 처절하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나아가 그런 실패를 하게 된 기원을 돌아봐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을 지켜봤던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그건 바로 ‘독선적 애국심’과 거기서 비롯된 ‘불신’이다.

 
한 친박계 중진 정치인은 “유달리 애국심을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을 의심한 적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만이 애국이며 다른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믿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10~20대의 18년을 청와대에서 생활한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세태에 염증을 느꼈다”며 “조금씩 드러나던 그 심리가 대통령 당선 뒤 뚜렷이 발현되며 여타 정치인을 불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위의 에피소드들은 그 방증이다 .

 
‘독선적 애국심’은 ‘애국심의 독점’으로 이어졌다. 정치인들은 통 믿지 못하니 공식 직함도 없는, ‘비선실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에 의지했다. 국민은 박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보내며 가능한 모든 인재와 자원을 동원할 권한을 줬지만 그는 반대로 갔다. 그의 불신은 결국 국민의 불신을 불렀다. 그 끝은 탄핵과 사법적 단죄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촛불시위 연장선상으로 탄핵까지 시킬 순 있었어도 사법처리까지 한 건 곤란하다. 현직에 있을 때의 통치행위에 대해선 정치적인 고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순수하게 법적 기준만으로 판결해 대통령을 가둬 놓는 건 한국 정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엔 권력을 잃으면 감옥에 가는 일을 감수해야 하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겼다. 박 전 대통령의 수감은 그런 우리의 정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야권은 형 확정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하고 있다. 최장집 명예교수도 “극심한 적대 정국을 해소하기 위해 대통령의 사면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낙연 대표의 사면론에 여론이 싸늘하자 대통령은 원칙론으로 돌아섰다. 18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 측이 사면을 계속 바라거나 요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문 대통령도 나중엔 사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건 대통합 호소가 아니라 구걸이나 떼쓰기, 일종의 협박이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점은 짚을 대목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는 “언젠가 때는 온다”로 들려서다. 그러다 보니 4월 재보선 전 3 ·1절이나 올해 광복절 또는 내년 대선 직전 사면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끊이지 않는다. 야권 지지자들이 문 대통령이 선거에서의 표와 사면을 거래 대상으로 본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여권이 이런 인식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조선시대 사면은 대기근으로 어려워진 백성을 달랬다. 현대 한국 정치사의 사면은 통합의 카드였다. 다 앞날을 위해서였다. 그러던 사면이 이제는 현실만 보는 정쟁의 도구가 됐다. 대통령이 사면은 요구나 거래의 대상이 아니며, 자신이 결단할 문제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고민 깊을 대통령에게 혹시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잠시 두 눈을 감아 여기 내 손을 잡아 저 미래로 달아나자’(Life Goes On 중에서).
 
이가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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